소설/술이 영업한다

술이 영업한다

오선닥 2012. 5. 18. 20:24

80년대 초

일본은 선박 건조량에서 세계 전체의 50%를 넘었다.

70년대 두 번의 오일쇼크로

80년대 세계경제가 저성장으로 접어들자

선박량이 과잉인 일본선사는 로비력으로

한국화주들의 화물을 싹쓸이 하다시피…….

 

 

 

 

술이 영업한다

 

 

일본 본사에서 전무를 비롯해 세 명의 간부가 한국의 합작회사를 방문했다. 내일 경주에서 코스틸과의 골프모임을 앞두고 서울로 온 것이다.

 

회사 응접실에서 커피 잔이 비워지기가 바쁘게 모두 일어섰다.

한국 측에선 사장, 상무 그리고 송 부장 등 세 명이 동행했다.

 

가을 하늘은 솜털구름 몇 조각만 데리고 높이를 자랑하며 끝없이 땅을 내려다보고 놀고 있었다. 정말 깨끗한 날씨였다.

 

짧은 치마가 돋보이는 TV 아나운서는 내일 날씨가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일 거라고 예보했다. 그녀의 옷차림만큼이나 산뜻한 날씨가 경주컨트리 대회를 멋있게 해줄 거라고 모두 기대에 부풀었다.

 

무교동 회사 앞에 주차해 있는 세단 두 대가 막 시동 걸 채비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손주리가 세단 옆에 서 있는 송 부장 앞으로 다가왔다.

 

“부장님, 구급상자를 준비했어요.”

 

“전쟁에 나가는 것도 아닌데 웬 키드야?”

 

“우에무라 전무님이 멀미를 잘하신대요. 키드 안에 멀미약과 약간의 비상약품이 들어있어요. 혹시 필요할까 해서요.”

 

구급상자를 받아든 송대길은 의사도 아닌 손주리가 일본 본사 전무의 건강 상태를 어떻게 알았을까, 사뭇 궁금했다.

 

“그 노인네가 멀미를 잘한다고?”

 

“회의실 커피 서브하면서 들었는데 멀미가 걱정된다는 말을 하시더라구요.”

 

회의실 대화는 관계자 외는 엿들으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들리는 귀를 막을 순 없었을 게다.

 

“참, ‘요이도메’를 어떻게 알아들었어? 그 어려운 말을?”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했어요.”

 

센스가 물씬 묻어나오는 여자.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을 만만찮은 여직원이다.

차가 앞바퀴를 굴리기 시작할 무렵 손주리는 허리를 반달모양으로 굽혔다.

 

“모레 부산 사무실에서 뵐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그녀의 출영 인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색과 검정색의 세단 두 대는 여름이 남기고 간 따끔한 태양 에너지를 받으며 경주로 향해 달렸다. 가을바람을 가르고 고성능엔진에서 열을 쏟으며 제한속력을 넘나들었다.

 

고속도로 양편으로 가을 황금들판이 낮의 햇살에 눈부시다.

 

앞차 은색 세단에는 일본 본사의 전무와 한국 회사의 사장 및 송 부장 세 명이 탔고, 뒤차 검정색 세단에는 일본 영업상무와 이사 및 한국 회사의 상무 세 명이 탔다.

 

그들의 스케줄은 경주에서 일박 한 후 오전부터 코스틸 간부들과 골프투어를 하고 저녁만찬에 참석하는 것으로 돼 있다. 공식행사가 끝나면 사장과 송 부장은 부산으로 가서 다음날 부산지사에서 부정기선부 업무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손주리는 그 부산회의에 합류할 것이다.

 

일본 간부들은 공식행사가 끝난 뒤 경주관광을 한 후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반반한 여자동행이라도 있으면 하루 이틀 더 한국에서 뭉갤 수 있다. 그렇다고 비난받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 출장 중’이라는 좋은 구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차 안에서 열심히 주고받는 대화는 웬만한 업무회의를 방불케 했다.

일본 간부들은 한일수호조약의 주인공들처럼 거드름도 피웠다.

 

앞차의 대화에 주목하자.

 

먼저 우에무라 전무가 입을 열었다.

 

“동양차터링과의 협조가 중요할 것 같은데…… 코스틸의 용선채널을 무시할 순 없으니 그쪽 김 사장과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 보세요. 갑이 신뢰하는 브로커니 어떡하겠습니까. 그리고 이백만 톤을 운송하려면 스무 번 정도는 포항에 입항해야 하니 대리점업무에도 신경을 좀 쓰시고…….”

 

멀미가 심해지기 전에 대화를 마치려는 듯 우에무라 전무는 대화의 시작임에도 한꺼번에 길게 쏟아냈다. 말투는 그 자신이 권위를 한껏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화중의 갑은 코스틸을 말한다. 갑과 유착돼 있는 동양차터링의 비위를 일부러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듣기에 매스꺼워 토할 것만 같은 송 부장과는 달리 사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평소 협조가 잘되고 있으니 크게 염려하시지 않아도 좋을 듯싶습니다. 신임 송 부장이 배에 대해선 베테랑이니까요.”

 

사장의 저자세가 불만스러웠다.

둘이 술 마실 때의 그 패기 만만함은 어디 갔단 말인가.

 

조수석에 앉은 송 부장은 대화의 허리를 잡고 매치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자신이 끼어들 대목이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일행의 계획은 금강휴게소에 들러 강물을 내려다보고 물에 비친 가을 산의 경치를 즐겨보는 것이었으나 이보다 앞서 옥천휴게소에 들르고 말았다. 우에무라 전무가 기어코 멀미를 참지 못한 것이다.

 

송 부장이 준비해 왔던 구급상자를 가볍게 꺼냈다.

 

“멀미약 좀 드시겠습니까?”

 

코앞에 대령한 멀미약에 전무는 말을 잃고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적시적소에 대령한 약을 보고 놀라면서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여행할 때 항상 준비하는 비상약입니다. 드시면 훨씬 좋아지실 겁니다.”

 

“하이, 아리카토. 이런 것까지 준비하시다니…….”

 

물론 뒤의 말도 일본말이다.

 

이 정도 치밀한 직원에겐 입출항 선박을 몽땅 맡겨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는 듯 전무는 약을 받아 들었다. 손주리의 준비성 덕분에 송대길은 보너스 점수를 얻은 셈이다.

 

갑과 을의 위치는 쉽게 바뀐다.

청와대에서 산을 움직일 듯 위세등등 하던 사람이 하룻밤 새 쇠고랑을 차는 일이 빈번하지 않았던가. 낮아지고 겸손해지라고 수없이 강조했는데도 한번 권력의 맛을 들인 사람에겐 우이독경.

 

경주로 들어서는 길 앙쪽에는 엄숙한 순찰차 대신 활짝 핀 코스모스가 일행을 맞이했다. 불국사의 부처가 내려와서 웃는 모습이 이럴 거다.

 

네 시간 반을 달려온 차는 ㄷ자 기와집 앞에서 멈췄다.

 

 

 

 

 

* * * * *

 

여자들이 쪼르르 마중을 나왔다.

 

“서울에서 내려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들어가시죠.”

 

인사는 나이든 큰언니가 하고 손님의 소매 자락은 젊은것들이 잡았다.

여섯 명은 고삐에 끌려가다시피 가운데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미리 예약해 놓은 경주의 요리 집은 한마디로 근사했다. 요리보다도 예약한 손님 숫자에 맞춰 아가씨를 먼저 준비해놓았다. 일본으로부터 귀한 손님이 갈 테니 알아서 대령하라는 전갈을 받았던 것은 틀림없다.

 

묵직한 기와로 덮인 아담한 집은 일본손님을 위압하기에 충분했다.

 

손잡이 있는 좌식의자가 큰상 좌우로 세 개씩 나눠 있었다.

 

예상 밖의 문제가 생겼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뚱뚱한 체격의 일본 상무가 큰 엉덩이를 집어넣을 방도를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손잡이가 없는 오픈의자를 따로 주문했다.

 

“미안합니다. 몸매 관리를 헤프게 해서…….”

 

그는 자신이 무슨 죄라도 지은 듯 미안해 했다.

앉는 것도 아주 힘들게 앉았다. 처량하다는 표현은 이때 적합한 말이다.

 

“몸은 저래도 공 칠 땐 허리가 잘 돌아간답니다. 같은 조에 배정된 분들은 긴장하셔야 될 걸요.”

 

일본 전무가 대신 그를 대변해줬다.

 

허리가 낭창한 아가씨가 뚱뚱한 일본 상무 옆에 자리했다. 나무에 매미 붙어 있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각 쌍의 몸무게 합계는 대체로 비슷한 것 같았다. 나이의 합계도 비슷하게 되었다. 일본 전무 옆에는 막내가, 송 부장 옆엔 큰언니가 앉음으로써 균형이 신기하게 잘 맞았다.

 

이런 배치는 큰언니가 그동안 쌓아 놓은 노하우의 결과물이다.

큰언니는 달변가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시비는 나이에서 출발.

 

“도대체 오빠야, 동생이야? 송 부장님의 민증 좀 보여주세요.”

 

그녀는 옆에 모시고 있는 손님을 놀리기 시작했다.

송 부장의 반격도 만만찮았다.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문서 읽는 거 들어봤어요?”

 

큰언니도 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 총 맞을 때 제가 놀라 어머니 젖꼭지를 꽉 물었대요.”

 

“그만 합시다. 보아 하니 만만찮은 언니네. 나이테는 같은 걸로 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술 취하면 민증 훔쳐 볼 거예요. 남자가 예쁘장하게 생겨 가자고 토~옹 나이를 종잡을 수 없으니…….”

 

시비가 중간에 그친 것은 밖에서 누가 송 부장을 찾는다는 전갈이 왔기 때문이다.

장고와 북소리, 여자 목소리가 시끄러울 무렵 동양차터렁의 김 사장이 찾아온 것이다.

 

정원 모퉁이의 벤치에 앉았을 때 김 사장이 용무를 말했다.

 

“송 부장님, 오늘 저녁 비용은 저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일본 손님을 별도로 모셔야 하지만 일정이 워낙 바쁘다고 해서 이렇게라도 예의를 다할까 합니다. 이차도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는 송대길과 비슷한 젊은 나이에 독립해서 돈 좀 만지고 있는 중이다. 코스틸 친구의 지위를 놓칠 리 없다. 잘나가는 종합상사의 물류부장을 박차고 나와 북창동 먹자골목의 빌딩 4층에 브로커 가게를 차렸다.

 

친구인 코스틸의 원료부장은 한 번도 사무실에 들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부하인 차장이 수시로 이 사무실을 들락날락했다. 메신저가 메시지를 소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송대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의도가 그렇다면 구태여 사양할 필요가 없고, 또 사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서 함께 한잔을?”

 

제의했지만, 물론 그는 사양했다.

이런 시나리오쯤은 일본 손님과 사전에 양해가 된 것을 모를 사람이 없다. 술값 + 알파의 지불 약속을 남기고 그는 돌아갔고, 술값 걱정 없는 방 안의 손님은 마시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내년 코스틸과 체결한 대량운송계약(COA) 물량은 철광석 이백만 톤이다. 중개료를 지불하는 일본 선사가 동양차터링을 중개사로 선택했다고 보겠지만 실은 양파를 한 겹만 벗겨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드러난다. 화주인 코스틸의 손톱이 먼저 보일 테고.

 

코스틸의 원료부장과 동양차터링의 김 사장은 고교 동창이다.

‘First Come, First Choice'라는 비즈니스의 불문율도 혈연・지연・학연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해운의 선진국 영국에서는 이 불문율을 어길 경우 피해보상까지 각오해야 한다.

 

화물중개 수수료의 관례는 정기선 화물은 5%, 부정기선 화물은 2.5%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곡물, 철광석 등 부정기선의 대량화물은 1.25%가 통례이다.

 

김 사장은 1.25% 수수료 중 소수점 아래 자투리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갑에게 내는 세금쯤으로 생각한다. 감동을 주면서 영업수명을 이어갈 것이다.

 

 

술은 진탕 취해야 본전을 뽑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술을 아끼는 사람이 있다.

이 저녁 가장 연장자인 우에무라 전무가 정신이 맹숭맹숭했다. 술이 세다고 한국까지 소문 나 있는 그가 술을 멀리하며 노골적으로 뒤꽁무니를 빼기 시작한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사장 한 사람뿐이다.

 

우에무라 전무는 오늘 저녁을 특별한 기회로 삼고 있다.

몇 달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주요 부분을 오늘 저녁 시험가동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배로 말하면 장기 체선 후 시운전하는 격이다.

 

“컨디션이 안 좋으시면 약주 양을 줄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250야드는 날려야 하시니까요.”

 

내용을 뻔히 알고 있는 사장은 시치미 떼는 말로 안개를 피워나갔다. 공 때문에 잔 수를 줄여야 한다는데 다른 사람이 눈치 챌 리 만무하다. 가장 어린 병아리 아가씨를 배치한 것은 의미 있는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술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술이 원수라도 되는 듯 자꾸 멀리하는 듯했다.

 

눈치 빠른 큰언니가 막내부터 눈짓을 했다. 눈짓의 해석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람 좀 씌겠습니다.”

 

막내는 우에무라 전무의 팔을 잡아 올리며 함께 나갔다.

일본말 하는 사람들이 줄줄이 가을 밤바람 받으러 나갔다.

이어서 한국말 하는 사람들도 따라 나갔다.

 

대기했던 택시들이 한 쌍씩 낚아채고 가을 밤바람을 갈랐다.

보문단지 C호텔 앞으로 헤드라이트가 띄엄띄엄 들어오더니 남녀 한 쌍씩 슬그머니 내려놓고 떠났다.

 

호텔 직원들은 특이한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나이 많은 남성일수록 동행한 여성은 젊어 보인다는 점>

 

우에무라 전무의 시운전 성적표는 본인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인 평가는 이튿날 시종 웃는 얼굴을 봐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걸로 반증됐다.

회춘했다는 소문이 살짝 흘러나온 것은 사장 입에서였다.

 

“다이조브데시타(괜찮았나요)?”

 

우에무라 전무는 비시시 웃었다.

그러고 옆에 서 있는 송 부장한테 시선을 돌렸다.

 

“송 상, 다이조브닷다(괜찮았고)?”

 

“아, 저는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그렇다. 송대길은 큰언니 덕분에 호텔이 아닌 가정집에 가서 하룻밤을 잘 보냈다.

이 사실을 누가 알랴.

 

그는 유곽을 나와 토함산 기슭 아담한 기와집으로 끌려가 잠도 자지 않고 스킨십만 당했다. 소통 잘되는 나이끼리니 인생여담이나 깔아보자고 여자는 한없이 이야기했다. 대통령 딸이 수학여행 때 묵은 여관이 헐어져 새로 지은 집이니 좋은 터라고 했다. 언젠가 본인도 그 공주처럼 잘 풀릴 거라는 믿음인지 꿈인지 잃지 않았다.

 

“스킨십만 했으니 김 사장님한테 받은 봉사료는 내일 택시비로 돌려 드릴게요. 송 부장님, 미안해요.”

 

또 비벼댔다.

 

“손님 취향대로만 하는군. 롱삿은 아꼈다가 내일 골프에서 날려야지. 고마~워. ㅎㅎ”

 

“그럴 줄 알았어요. 애처가라는 걸.”

 

그리고 더 세게 비벼댔다.

그녀는 99% 부족을 느끼는 사람처럼 초조해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무척 외롭다고 고백했다.

 

“군중 속의 고독…… 아시죠?”

 

“…… 글쎄.”

 

스킨십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더 깊은 고독에 빠져들 여자였다.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따로 있다고 했다.

 

분명히 호텔로 기기로 했으나 토함산 쪽으로 간 이유는?

이런 위로를 나누기 위해서였나.

 

 

 

 

 

* * * * *

 

홀에만 신경 써야 할 날이 됐다.

다들 홀인원의 행운이 오길 바라면서 골프클럽을 만지작거렸다.

 

“홀인원을 호텔에서 한 사람도 있다더라.”

 

듣기엔 민망한 농담은 항상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입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코스틸의 전무가 오늘 행사의 주빈으로서 클럽 로비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던진 농담이다.

간밤에 호텔에서 해포를 푼 사람들은 그를 향해 고개를 모았다.

이런 경우 옆에 있는 사람은 웃어주는 게 예의다.

 

티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로비는 일본말과 한국말이 뒤범벅되었다. 열여섯 명의 일행 모두가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일본의 잔재가 씻기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일본과의 비즈니스를 위해 불가피하게 '니혼고'를 배워야만 하기 때문일까.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차근차근 필드로 나갔다.

 

코스틸 전무와 원료부장, 우에무라 전무와 송 부장이 한 조가 됐다.

이런 조 편성은 골프투어를 주선한 사장의 계산에 숨어 있었다.

 

티업 전에 사장은 송 부장에게 귀띔을 주었다.

 

“중요한 정보는 이 조에서 나온다. 특히 원료부장의 말에 주목해야 할 것.”

 

코스틸의 원료부장이 친근감을 보인 것은 다행이었다.

 

“송 부장, 굉장한 장타시군요. 4번 홀에서 오비만 나지 않았더라도 스코어가 제일 앞서는 건데.”

 

시종 조용했던 그가 자신의 점수가 송 부장의 것을 제치자 의기양양해짐과 동시에 화색이 만면했다.

 

송 부장이 접대 골프 한 번 친 것을 그가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개념없이 귀빈의 스코어를 뛰어넘는 만용은 비즈니스의 기초 부족.

갑의 심경을 잘못 건드리면 을의 오퍼시트는 갑의 책상서랍 속 깊숙이 박혀버릴 것이다.

제3공화국의 모 장관은 내기골프에서 집 사고, 땅 사고 한 것을 어찌 모르는가.

 

우에무라 전무의 퍼팅실력이 돋보였다. 흰머리 빗질만큼이나 그린의 잔디를 열심히 쓸어온 그의 경륜이 실력으로 나타났다. 금방 원료부장의 스코어를 넘어섰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송 부장이 접대를 망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원료부장의 공이 그린 온하여 홀컵에서 일 미터 쯤 가까스로 멈췄다.

 

“송 상, 이거 오케이 해드립시다.”

 

우에무라 전무의 재빠른 제의에 놀란 쪽은 송 부장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닳고 닳은 비즈니스맨 우에무라인데.’

 

안심이었다. 일본의 퍼팅이 짜다는 소문이 있는데, 오늘 접대자의 역할을 훌륭히 잘해내고 있는 그의 노련함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부장은 껍질도 벗기지 않고 ‘오케이’를 받아먹었다. 홀컵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공을 집어든 그는 퍼터의 목을 잡고 팔꿈치를 브이 자로 꺾었다.

새(Birdy) 잡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하는 듯.

그는 여세를 몰아 17번 홀에서 독수리(Eagle) 한 마리도 챙겼다.

 

조의 최다득점자는 원료부장이었다. 코스틸 전무의 3위 득점은 관심이나 동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철광석 이백만 톤 운송이 원료부장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상관인 전무의 존재감조차 미약하게 했다.

 

코스틸 영빈관에서 이뤄진 저녁 리셉션파티에서 사장은 만족했다. 기대했던 대로 원료부장의 스코어 결과가 좋았기 때문이다. 마치 큰 계약이라도 한 건 만들어낸 것처럼.

 

 

골프장에서 흘린 땀은 샤워장에서 씻겨나가고 모두들 양복 차림으로 바뀌었다.

쇳가루(코스틸)와 소금물(해운회사)이 적절히 섞인 좌석배치는 서로의 교분을 위한 것이다.

 

기름에 볶인 새우는 허연 살을 드러내고 양주 안주가 되길 기다렸다. 걸대에 매달린 양고기는 얇게 썰어져 사람들의 식욕을 유혹했다.

한국 사람의 잔 돌리기에 이미 익숙한 천왕신민들도 사양치 않고 잔을 잘 돌렸다.

로마에서 로마의 법이 잘 통하고 있었다.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솜씨 좋게 서브하는 아가씨의 아오자이 같은 옷이 허리 살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것 같았다.

 

“오늘 저녁은 웬 살들이 많이 보여? 새우, 양고기, 아오자이…….”

 

난청의 사람조차 들릴 정도로 누군가 톤을 올렸다. 영빈관에 익숙한 코스틸 임원의 농이었다.

 

<한껏 무르익은 아름다움>을 농염이라고 한다.

그 농염이 아가씨들의 옷에서 흘러나왔다.

 

 

 

 

 

* * * * *

 

 

코스틸 리셉션이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송대길은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는 사장과 부산소장이 열심히 대화를 나눴다.

 

“팽 소장, 양주 두어 잔에 내가 팽 돈 것 같여. 이왕 돈 김에 우리 울산에 가서 한잔 더 하자구. 자네 고향에서 말여.”

 

사장을 픽업하러 부산에서 포항까지 온 부산소장은 숨 돌릴 새 없이 사장의 대화를 받아주기에 바빴다. 그는 용강 팽 씨요, 고향은 울산이다.

 

소장의 반응을 기다리기 전에 사장은 송 부장을 건드렸다.

 

“송 부장, 오늘 어땠어? 괜찮았지? 고기는 큰물에서 놀아야 해. 그리고 비즈니스는 공짜가 없어.”

 

사장은 더욱 길게 앉으며 입가의 미소를 깔았다. 입가로 술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술 취한 사람 비위 맞추는 데는 송 부장이 수준급.

 

“네,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다음 계약 때는 사우나탕에 들어가서 스킨십이라도 하면서 밀착 교분을 가질까 합니다.”

 

엊저녁 큰언니와의 스킨십이 자꾸 머리에 감돌더니 기어코 입술에서 비집고 나와 버렸다.

 

지휘관은 예스맨보다는 일의 방법을 제시하는 부하에게 신임을 더 주는 경향이 있다.

차지철이 박 대통령한테 신임을 얻은 것도 ‘탱크로 밀어 붙이시죠’ 한 마디에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달콤했지만 결과는 쓰디쓴 파멸이었지만.

 

“우리한테 주인 행세하던 일본 친구들 보라구. 코스틸 앞에선 납작하지 않았어? 그때 받은 스트레스를 내일 경주 구경하면서 풀겠다는 거 아녀.”

 

큰 행사를 치렀다는 만족감과 벌레처럼 기어오른 술기운이 사장을 더욱 들뜨게 했다.

 

팽 소장은 전망 좋은 바닷가 이층 횟집으로 안내했다.

십 년 전 이 횟집에서 한 여자에게 소주를 먹여 부득불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가 잉태한 첫딸의 이름이 ‘고동’이었다. 여관 이름이 ‘쌍고동’이었더라나.

속도위반 덕분에 일찌감치 결혼의 행복을 체험하고.

 

사장의 술 자랑이 발동 걸렸다.

 

“술은 생선회에 소주가 최고야. 오늘 저녁 우리 셋이서 누가 많이 마시는가 시합하자구.”

 

자정이 가까웠는데도 주인아주머니는 가게를 닫지 못하고 있다.

 

사장, 소장 그리고 부장은 의무적으로 돌아가면서 한 잔, 두 잔, 그리고 계속 마셨다. 송대길은 속이 이미 비틀어져 나가기 시작했지만 취하기는커녕 맹숭맹숭 하면서 배만 아프기 시작했다.

 

‘이 시합에서 낙오되면 안 돼!’

 

그가 마음의 준비를 마치기 전에, 평소부터 <술이 영업한다>를 강조해온 사장이 먼저 원삿으로 잔을 비웠다.

순번으로 돌아온 잔을 송대길이 털어 넣었다.

 

‘아무렴 뱃속이 아프지 이 송대길이가 아프겠냐?’

 

어느새 두둑한 뱃장이 그를 꼿꼿이 세웠다.

 

세 사람은 용감했고 소주가 맹물인 줄 알고 만용을 부리기 시작했다.

횟집 아주머니가 매상을 그만하겠다고 소주를 숨기지 않았더라면 창자에 피가 쏟아져 나올 때까지 마셨을 것이다.

 

울산을 떠난 차는 사장의 숙소인 해운대 해변의 C호텔로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술꾼들을 태우고 다녀야 하는 기사 아저씨의 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다.

 

“이제 숙소에 왔으니 지하 나이트에 가서 맥주 딱 한잔만 하자구. 오늘 기분 짱인데 이대론 잘 수 없어.”

 

사장은 도통 끝낼 생각이 없었다. 숙소인 호텔에 왔으니 아무 걱정 없다고 막무가내다.

 

나이트는 느지막이 온 손님이 대환영이다. 술이 술 마시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나이트의 천정은 제 마음대로 돌아가고, 형형색색의 불빛도 천정과 함께 마구 돌아갔다.

아가씨들이 남자들의 허리를 잡고, 팔을 들기도 하고, 가랑이를 잡아도 해삼 덩어리처럼 흐느적거렸다. 그녀들은 사람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를 희롱하면서 즐기기도 하고 짜증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고꾸라졌다.

 

 

 

 

 

* * * * *

 

목이 타고 속이 매슥매슥하자 화장실을 찾았고, 코를 찌르는 냄새에 정신이 들었다.

송대길은 화장실 바닥에서 뿜어 나오는 냄새에 코를 막았다.

그러나 토해낸 음식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어제 밤 한바탕 쇼를 했음이 틀림없는데.

 

불빛이 번쩍번쩍 하는 데까지만 기억이 살아 있었고 그 후로는 죽어 있었다.

필름이 철저히 끊겨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지구상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궁금했다.

이른 아침, 고양이 세수를 하고 옷을 대충 걸치고는 호텔 카운터로 나왔다.

위치는 서면이었고, 작은 호텔이며, 그의 앞에는 카운터 아가씨가 서 있었다.

 

“손님, 어제 저녁에 너무 취하셨던가 봐요. 다행히 화장실까지는 가셨어요.”

 

“그럼 구토물은 호텔에서 치웠다는 겁니까?”

 

“아녜요. 같이 오신 여자 손님이 수고하셨어요.”

 

“아니? 여자 손님이라고?”

 

“지금 옆방에 주무시고 계셔요. 함께 계산하실 거 아녜요?"

 

호텔 아가씨가 가르쳐준 방은 바로 그의 옆방이었다.

 

한참 후 방에서 밤색 정장에다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여자가 나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그 여자는 다름 아닌 손주리였다.

 

“왜 놀라셔요? 어제 저녁엔 전혀 놀라시지 않더니. 이젠 정신 드셔요?”

 

“정신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체크아웃이나 하자고…….”

 

송대길은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돈이 손에 잡히지 않자 카운터 아가씨와 손주리를 두리번거려 쳐다봤다.

손주리가 웃었다.

 

“어제 나이트에서 세 분의 지갑을 다 털어 술값 계산했대요. 그러니 당연히 비어있죠.”

 

핸드백을 열어 그녀가 계산을 마쳤다.

 

어젯밤은 운전기사 혼자서 생쇼를 했다고 한다.

사장을 C호텔 방으로 안내하고, 부산소장을 댁으로 옮겨 놓은 후, 마지막으로 송 부장을 여기 호텔로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마침 부정기선 회의를 위해 부산에 내려온 손주리가 이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대리점부 유 과장으로부터 듣고 기사가 여기에 짐짝처럼 갖다 놓고 손주리한테 맡긴 것이다.

 

송대길은 필름 끊어진 시간을 점검하고 싶었다.

 

“어제 내가 실수하지 않았어?”

 

손주리는 킥킥댔다.

 

“실수…… ㅋㅋ 많이 하셨죠.”

 

 

“내가?”

 

“왜 신발을 벗지 않으려고 하셨어요? 평소 바깥에서 주무신 적이 없으셨나 봐요?”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현상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평소의 행동과 생각을 연관시켜 봐도 볼트와 너트가 맞질 않았다.

 

“그럼 다른 실수는?”

 

“제 잠옷이 약간 수난을……. 옷은 빨았으니 괜찮아요. 그런데, 부장님 속은 괜찮으셔요?”

 

오물이 쏟아지는 것과 이걸 닦아내는 손주리의 모습을 상상하면 얼굴에 불꽃이 일어날 지경이다. 미안하다는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무 염려마세요. 부장님 단벌이 더렵혀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예요. 드라이할 시간도 없었을 테니 말예요.”

 

부산사무소에서 회의가 시작되기 전 어제 저녁의 술 시합 이야기가 나왔다.

상황의 앞뒤 과정을 봐서 무승부로 봐야 한다는 게 배석자들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나이순으로 고꾸라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