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슬픈 단군 자손

슬픈 단군 자손

오선닥 2012. 4. 13. 19:25

1979년 볼티모어

두 미국 아가씨가 시차를 두고 배에 올라 왔다.

여니 여자들과 다른 점은 성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한 아가씨는 통일교 신도로서,

다른 아가씨는 개신교 신도로서

각자의 선교 목적으로 승선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그들 둘 다 반쪽짜리 단군 자손.

 

 

 

 

 

 

  슬픈 단군 자손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래서 배는 오늘도 항구를 찾아 들어간다. 심수봉이가 노래하지 않았더라도 들어갔을 것이다. 먼 나들이 후 항구 품에 포근히 안겨 피로를 풀고 싶은 마음, 안락함을 느낀다.

볼티모어에 도착하기 전 왼쪽에 아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젊은이의 냄새를 맡았다.

 

볼티모어 항에 들어간 것은 많은 의미가 있다.

워싱턴이 가까워 백악관 카터를 방문하기 쉬워서가 아니라 볼티모어는 역사적으로 확실히 한국과 인연이 깊은 도시이다. 방명록이라도 비치했더라면 이렇게 서명을 했을지도.

 

‘선교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백 년 전쯤 한미수호조약 체결 후 답례사절로 미국에 간 민영익은 미 서부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볼티모어 대학교 총장인 가우처 목사와 동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년 후인 1885년을 기점으로 미국 선교사 5명이 한국에 들어왔다.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는 배재학당,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는 연희전문학교, 감리교 스크랜튼 여선교사는 이화학당 등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들보다 4년 늦게 서울에 온 캐나다의 침례교 선교사 팬윅도 독립적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영국 구세군교회는 아펜젤러보다 20년 후 구세군 사관 호가드 정령을 한국에 파견해 선교활동을 했다.

 

이들보다 약간 먼저 서울에 온 미국의 의사 알렌이 고종의 도움으로 광혜원(현 서울대병원)을 설립한 것은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부두에 접안해 하역작업하고 있는 중에 백인 아가씨 한 명이 승선했다. 관계자 외의 여성 방문에 대해 항만당국은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 게 대국다운 통큰 배려로 보인다. 볼티모어 인구 거의 절반이 흑인인데 흑인 아가씨는 안 보이고.

 

청바지를 입은 아가씨는 한 손에 성경책, 다른 손에 커다란 핸드백을 들고 선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눈이 크고 두발이 검으며 얼굴 윤곽이 뚜렷한 여자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성경책을 두 손으로 모아 잡고 기도인지 주문인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짧은 묵상이 끝나자 핸드백 지퍼를 열었다. 안에는 껌, 초콜릿, 액세서리……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 있다.

 

짓궂은 2항사가 이 아가씨도 그렇고 그런 부류라 여기고 농을 던졌다.

 

“간단한 면회는 얼마지요?”

(How much for a brief meeting?) 

 

“대화는 무료예요.”

(Any conversation, no pay.) 

 

여자의 대답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2기사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면서 이번엔 한국말로 농을 거들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는 농담해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에서 태연하게 톤을 깔았다.

 

“아니, 간단한 저녁 미팅이 얼마냐고요?”

 

침착함의 완결자라고 해도 좋을 만치 그녀는 천천히 두 질문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존경하는 문선명 목사님에 대한 모욕예요.”

 

“앗? 한국말 할 줄 아네!”

 

2기사가 더 놀랐고, 옆의 다른 사람들도 어리둥절했다.

 

아가씨는 핸드백을 도로 닫고 자신의 할 말을 이어나갔다.

 

“전 통일교 교인예요.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걸 교회가 제공해줍니다. 아파도 걱정할 필요 없고요. 병원비, 약값 모두 공짜예요. 이런 물건들 사주시면 전부 교회에 바칩니다. 교회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요. 저희들은 항상 천국에서 살고 있지요.”

 

길어지는 아가씨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2항사는 일단 사과부터 했다.

 

“아가씨, 정말 죄송해요. 우리가 심한 농담을 해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가로 미소를 흘렸다. 2항사의 얼굴의 뺨은 익은 사과보다 더 붉었다.

 

“문 목사님을 사랑하지만 전 한국 나라도 사랑해요. 저의 아버지는 한국인예요. 어머니는 에콰도르인이고요.”

 

아가씨의 반쪽 조상은 단군이로군. 그렇지만 그녀의 외모는 단군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전혀 볼 수가 없다. 백퍼센트 라틴계 여자로만 보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교를 졸업하고 통일교에 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역 근처에서 하릴없이 놀다가 이웃 형의 소개 반 꼬임 반으로 청파동 통일교 본부에 들어갔다. 이후 광신도가 되었다. 문 교주의 충성된 종으로 선발되어 뉴욕으로 온 그는 맨하튼의 한 멕시코 식당 종업원인 라틴계 아가씨를 만나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 합동결혼식이 치러졌고, 신부는 자연히 통일교로 개종했다.

 

신혼살림이 일 년도 되기 전에 남편은 남아프리카로 포교 명을 받아 검은 대륙 선교에 나갔다. 불행하게도 인종분쟁 지역에 머물다가 누구의 총알인지 유탄인지 모르지만 그길로 낮선 곳에서 죽었다. 정착하면 아내를 부르겠다고 한 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딸은 석 달 후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럼 지금 어머니와 함께 사는가요?”

 

동정심을 가지고 2기사가 질문했다.

동양 사람의 거침없는 개인 신상 질문에도 그녀는 숨길 마음이 없다.

 

“뉴저지에 있는 통일교 타운에서 살아요. 저의 어머니는 뉴요커호텔에서 일하시고요. 청소일 하고 있어요.”

 

뉴요커호텔은 4년 전 통일교가 매입해 통일교 미국 본부로 사용하고 있다. 매니저든 청소부든 공동생활을 하는 그들에겐 직업의 종류는 의미가 퇴색된다.

 

“애국가 한번 불러볼까요?”

 

갑자기 아가씨의 목소리가 맑아지면서 엉뚱하게 애국가를 부르겠단다.

마침 커피를 타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서던 조리원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미국 애국가, 아니면 한국 애국가?”

 

“애국가는 대한민국 국가잖아요. 마지막 4절만 부를게요.”

 

그녀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러면서,

 

“애국가 부르는데 다들 일어서셔야죠.”

 

그녀가 먼저 일어섰다.

가만히 앉아서 아가씨 얼굴만 보고 있다가 엉겁결에 모두들 일어섰다. 최면에 휘둘린 표정들이었다. 종교도 일종의 최면이라고 했던가.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거침없이 후렴까지 다 부른 것이다. 가사와 음정에 압도된 후 어울리지 않는 엄숙한 분위기는 끝이 났다. 그녀의 애국가는 선원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선원들은 안익태 선생한테 꾸중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애국가 부른 지가 몇 년 만이던가. 선원들의 동공이 커질 만하다.

 

국가(國歌)에 관해서 볼티모어는 할 말이 있다. 미국의 국가 <별이 빛나는 깃발>은 볼티모어가 소속된 메릴랜드 주의 변호사 키 씨가 쓴 시이다. 인도와 방글라데시 두 나라의 국가를 작사한 시인 타골이 유명해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선명 총재가 한국을 ‘신앙의 조국’으로 지칭하는 것은 통일교가 애국가를 제1의 찬송가로 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교는 기독교의 이단으로 몰리고 있다.

 

1954년 당시 34세의 청년 문선명은 어떤 교리 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했기에 그럴까.

 

 

 

* * * * *

 

통일교는 원래 기독교의 한 유파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통일교를 가장 적대시하는 세력이 바로 기독교다. 장로교·감리교·침례교 그리고 다시 무슨 파 하면서 많은 유파로 나뉜 그 기독교가 적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 기존 교파 간에는 서로 건드리지 않는 ‘공존’이 이뤄져 왔다. 그러나 유독 통일교에 대해서만은 문호를 열지 않고 오히려 ‘이단’ 혹은 ‘기독교의 적’으로 대해 왔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흔히들 소문내기 좋은 말로 신도들을 농락하고 감금, 폭행하면서 갖은 돈벌이를 강제로 시켜서 그렇다고도 하나 법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실제로 통일교 초기 돈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 통일교의 수입원은 두 가지다. 하나는 헌금, 다른 하나는 기업체의 수익금이다. 중앙집권제인 종교적 특성에 따라 헌금은 문 총재에게 집중된다. 헌금이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돈이 이동하다보니 오해를 살만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문총재와 부인 명의로 된 재산이 통일교 내에 동전 한 푼 없는 것으로 돼 있다는 점이다. 이들 부부뿐 아니라 자녀 13명 또한 통일교 내에 재산이 하나도 없다. 모든 재산은 유지재단(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 소속돼 있다. 빈손으로 와서 여전히 빈손으로 가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보면 기독교에서 ‘적대시’할 외양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교리다. 어떤 교리인가. 기성 기독교와 성서 해석과 교리를 전혀 달리하는 독특한 신앙 체계 때문이다.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인간 구원 섭리’라는 대전제에서 교리가 출발한다.

 

뱀의 유혹으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으니, 인류가 지은 원죄(原罪)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모두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만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바탕 위에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

 

그런 구원의 섭리를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수많은 선지자를 보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역시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 그러나 유대인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지상에 천국을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의 대속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이 중심인물을 보냈다. 바로 문선명 총재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실패한 구원을 문선명을 통해 지금 구원의 섭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들이다. 무엇보다 당장 문 총재가 ‘하나님 섭리의 중심인물’로 자처한다는 점이다. 기성 기독교계로선 경을 칠 노릇이다. 문 총재 부부를 ‘참부모님’이라고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통일교 측은 문 총재 자신도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고 있는 ‘중간존재’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인간 세계에 내려온 존재라는 설명이다.

 

기성 기독교가 이를 인정할 리 없다. 구원에 이르는 길도 다르다. 기독교에서는 ‘믿음’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반면 통일교에서는 믿음은 구원받기 위한 필요조건이며 여기에 ‘지상에서의 실천’이라는 충분조건을 갖춰야 구원받는다고 보는 것이다. 어떤 실천은 가정, 이웃, 세상에 사랑과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방법에서 차이가 나는 만큼 기성 기독교는 통일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삼위일체 원리로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 성체로 믿는 반면 통일교는 예수를 '중간존재'로 여긴다. 기독교의 이단 판단은 결국 삼위일체 원리인 '사도신경'을 고백하느냐 아니 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통일교가 한국의 땅 부자 교회로 된 데는 거미줄 같은 신도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은 거미를 ‘위대한 재봉사’로 표현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해서 비바람에도 끊어지지 않는 집을 짓기 때문이다. 출렁거리는 금문교는 위태해 보일지 모르지만 거미줄은 비바람에도 거뜬하다. 통일교는 종교를 떠나 애국심과 가족관에 포인트를 잡아 160여개국에 거미줄을 친 것이다.

 

1975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통일교 구국세계대회에 참가한 70만 명의 신도들이 모였다. 거미줄의 위력은 일화, 리틀엔젤스, 가평타운 등을 설립하고, 북한에 평화공원과 평화센터, 평화자동차 공장을 세우는 일에도 세력이 미쳤다.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일교 아가씨 때문에 통일교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워낙 궁금한 종교단체여서.

 

그녀는 애국가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배를 떠났다.

물건은 하나도 팔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반쪽 단군 자손 그녀도 통일교의 새로운 이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이 주최하는 합동결혼식에서 통일교 신도 누군가와 성혼서약을 할 것이다.

 

 

 

* * * * * *

 

오후에 또 한 명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승선했다.

볼티모어 선원선교센터 소속 선교사다.

 

그녀는 곧장 선원식당으로 들어갔다. 어느 곳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모여 있는지 빠삭하게 아는 사람같이 보였다. 짧은 스커트 아래로 길게 뻗은 건장한 다리는 남자 선원들의 시선을 혼란케 할 만하다. 그녀의 이런 모습이 선교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나중의 문제다. 부모님이 물려주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선물로 준 몸매라고 그녀는 생각하면서 항상 감사해했다.

 

“항해는 즐거웠어요? 얼마 전에는 워싱턴 부근에 토네이도가 지나갔습니다만…….”

 

날씨는 글로벌 보편적인 관심사라 낯선 사람에게도 친근감을 주는 인사말이다.

 

옷차림을 봐서 바깥 날씨는 그리 춥지 않은가 보다. 여름이 남겨 놓은 약간의 더위를 느낄 수 있으니 가을은 이제 현관문에 들어선 정도.

 

그녀의 스타일에 좀 부담스러워 보이는 가방 하나가 소파에 내려졌다. 가방에는 작은 찬송가책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한글 찬송가를 가져왔어요. 원하시는 분들에게 드리겠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에겐 한 권씩 다 드릴게요. 노래책이니까 방에 비치해 두세요.”

 

담배를 피우고 있던 조기장이 꽁초를 비벼 끄면서 한 권을 받았다.

 

“성경책은 없습니까?”

 

담배 피우던 손이 부끄럽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는 성당에 다니곤 했지만 전혀 담배 끊을 의사가 없다고 평소에도 강조하던 사람이다. 신부님도 담배 끊을 생각이 없다고 하던데 뭐, 하면서.

 

“한글 성경책은 없고, 영어 성경책 두 권 있어요. 괜찮으시겠어요?”

 

“영어는 짧아서…….”

 

“내일 주일 교회에 오시면 한글 성경책 몇 권 구해 놓을 게요. 볼티모어 시내에는 한인교회가 몇 군데 있으니까요.”

 

아가씨는 신앙에 관한 한 지나칠 정도로 친절했다. 한글성경을 시내에서 구입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도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무료로 주선해줄 수 있다고 했다. 세계 성경보급 단체인 ‘기드온’에 부탁하면 어떤 언어의 성경도 보급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참 좋은 세상이구나. 중딩 때 그렇게 갖고 싶었던 성경책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자신의 손에 성경이 주어졌더라면 지금쯤 신부나 목사가 되어 있을 거라고 조기장은 생각했다. 여차해서 목사가 됐더라면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 테고.

 

일본에서 조총련 사람과 술을 마셨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각서를 쓴 바 있는 갑판수가 호기심을 가득히 머금고 질문을 했다.

 

“아가씨는 공산 국가 선박에도 선교를 하나요? 이를테면 북한 선박에도…….”

 

어설픈 통역으로 뜻이 전달되었다.

그녀는 웃었다.

 

“물론이죠. 북한선박에도 선교활동을 하지만 김일성 사진 앞에서 기도부터 하라고 해서. 이게 말이나 됩니까. 우상 앞에 서라니?”

 

“교묘한 방해 작전이네요.”

 

지금까지 주고받은 대화는 좀 형식적이었다.

 

선원들은 이 예사롭지 않은 용모의 여자가 뭘 먹고 사는지 궁금했다. 통일교 신도처럼 행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찬송가는 무료로 배포해서 ‘소는 누가 키울까’의 의문이 들기까지 하니.

 

“선원선교센터의 지원으로 활동해요. 선교센터는 시의 지원과 독지가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고요.”

 

그녀는 내일이 일요일이니 교회에서 예배드릴 것을 제안했다.

이번에는 자칭 종교 이론가로 자부하는 통신차장이 궁금한 질문을 했다.

 

“선원들 예배는 어느 교회에서 드립니까?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 아니면 통일교? 그리고 가톨릭교도 있고요.”

 

“형제님은 교회에 대해서 많이 알고 계시는군요. 아무 교회라도 괜찮습니다만 전통 있는 감리교회로 안내할게요.”

 

형제님의 호칭에 대해 통신차장은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한인교회는 어떻습니까?”

 

“안내하고 싶습니다만 거리가 좀 멀어요. 사실 제 아버지도 한국인예요. 카자흐스탄에 선교사로 가 계셔요. 반쪽짜리 코리안 사랑해주세요.”

 

선원들의 놀라움이 컸다. 단군의 피가 튀어간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완전 서양인이 한국인이라니. 미국에 오면 한국인의 유전자는 맥을 못 추나 보다. 늘어진 키부터가 그렇다. 튀기가 예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좋은 유전자만 뽑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자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 온 아버지와 미국으로 종교음악을 공부하러 온 스위스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감리교에서 파견한 선교사였다. 선원들의 예배를 감리교회로 안내하는 이유도 이와 조금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약간 슬퍼해야 할 부분은 아버지가 선교기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미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 년에 한 번씩 잘 있다는 연락만 하고.

 

아가씨는 내일 오전 목사님이 선원들을 픽업하러 올 것이라고 하면서 배를 떠났다.

 

단군의 딸들 ─ 통일교 아가씨와 감리교 아가씨.

꿈의 나라 미국에서 슬픈 사연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겠지.

 


 

 

* * * * * *

 

약속했던 대로 이튿날 선원선교센터의 목사가 방선했다. 나이가 지긋했다. 선내 사무실에서 간단한 기도를 하고 교회에 갈 선원들을 모았다.

 

여덟 명의 선원이 부두에 대기하고 있는 승합차에 탔다. 송 선장도 합류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교회에 가 본 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교회는 부두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었다. 나이에도 불구하고 운전하는 목사는 시선에 들어오는 건물과 경치에 대하여 친절하게 설명했다. 가우처 목사가 총장으로 제직한 대학교를 지나갈 때는 한국 선교에 대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한국 선교의 문을 여는데 길잡이 역할을 한 가우처 목사를 회고하면서 한국 교회의 발전이 경이로운 것이다.

 

“세계 최대의 교회가 한국에 있다죠. 그게 선교의 열매랍니다.”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 발을 디딘 지 100년도 안 돼 신도 50만을 훨씬 넘는 세계 최대 교회가 한국에 들어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운전을 하면서 목사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국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미국도 사랑하고요. 풍요롭고 아름다운 저기를 보세오.”

 

경치 좋은 언덕 위에 아담하게 얹어놓은 교회는 풍경화 속의 건물 같았다. 야외 나들이 나온 옷차림을 한 성도들이 무리를 지어 눈에 들어왔다. 교회는 주일 친교 장소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특별히 선원들에게 친절을 아끼지 않았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선원들은 약간은 쑥스러워하기까지 했다.

 

아주머니들이 왜 이리 친절하지. 한국 교회의 아주머니들도 친절했었지. 전도의 70퍼센트는 아주머니들의 업적이라는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

 

담임 목사의 설교는 낚시꾼이 되라는 것이 요지였다.

물에 물고기가 많듯 뭍에는 영혼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 이들을 낚아 올려라.

 

말씀을 받았으니 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선원을 대표해서 송 선장은 헌금바구니에 백 달러를 넣었다. 손이 뿌듯했다. 한국에 최초로 선교사를 보낸 교회가 이곳 감리교회였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21세기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주고받는 사례는 불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명상법이라는 것. 먼저 상대방의 고통을 내가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나의 고통을 나의 행복으로 바꾸며, 마지막으로 나의 행복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기브 앤드 테이크(Give & Take)' 명상법 말이다. 자신이 맑아져야 다른 사람을 맑게 할 수 있고, 남의 행복을 위해서 끝도 없는 자기 욕심을 멈추는, 소위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명상법에서 익힌다.

 

“선원을 대표해서 선장님께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예배가 끝난 후 목사의 갑작스런 부탁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분과 함께 해서 반갑습니다. 예배에 참여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I am very happy to be here with you. Thanks to God for joining the worship service.)

 

대충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인사를 때웠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영어공부 더 하는 건데. 준비되지 않은 인사는 미국인에겐 자연스럽지만 한국인에게는 얼마나 어색하냐. 환영의 박수는 필요 없는데 500여명의 손바닥은 놔둬서 뭐하느냐는 듯…… 창피하게스리.

 

교회 앞 잔디 정원에서 점심 뷔페가 준비되었다. 감리교 아가씨는 식사 서빙에 참여했다. 얼굴 익은 선원들을 보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봉사에 열중하는 모습은 반쪽의 단군 자손이 결코 이 시간만큼은 슬퍼 보이지 않는다.

 

뷔페 요금은 어른이 8달러, 어린이는 5달러였다. 적은 돈이 아니지만 남는 금액은 선교기금으로 사용된다나. 선원은 손님이기 때문에 무료 대접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한국인 젊은 부부가 선원들 곁으로 와서 악수를 청했다. 한인 교회가 아니어서 한국인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오늘 인사말 때문에 알게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세탁소나 야채장사를 하면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인데 남자는 유학생으로 와서 정착하여 IBM 연구원으로 근무한다고 한다.

 

송 선장 옆에 또 누군가 다가섰다. 구레나룻 수염을 한 백인이 웃음을 흘리며 악수를 청했다.

 

“소련 선박 무르만스크호의 선장 진젠코입니다. 이 여성은 저의 비서 겸 경리이고요.”

 

여성 비서를 대동한 소련 선장은 퍽 남성적으로 보였다. 단순한 선장이 아니라 공산당의 고위직 간부라도 되는지 불룩한 배는 비밀을 잔뜩 간직한 것처럼 보였다. 같은 선장으로서 인사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코멘트였다.

송 선장 역시 반가웠다. 같은 선장으로서.

 

“프레지던트호 캡틴 송입니다. 남한 사람입니다.”

 

북한 사람으로 잘못 알까 봐 남북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런 구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미소만 지으며 대화에 열중했다.

 

그는 카자흐스탄 출신이었다. 감리교 아가씨의 아버지가 선교활동하고 있는 나라가 그의 고국임을 알고 아가씨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었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녀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미국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정부에 압력을 가해 추방이라도 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아가씨는 고마워했다. 반드시 아버지 손에 이끌려 결혼식을 올리고 싶은 것이다.

 

무르만스크호의 승조원 수가 궁금했는데 마치 진첸코 선장은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 선원은 50명인데, 한국 라면을 아주 좋아합니다. 혹시 구입할 수 있을까요? 특히 여성들이 좋아합니다.”

 

특이하네. 라면 하면 일본인데. 또 선원들은 왜 그렇게 많아. 30명 정도가 일반적인데. 정치 목적으로 승선한 사람이 있나. 혹시 라면을 핑계 삼아 접선공작이라도? 북한 사람 다음으로 경계 대상은 소련 사람이다. 소련 국기의 낫과 망치만 보아도 소름이 끼칠 정도다. 비서 여성은 공작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반공교육에서 배운 대로라면.

 

그러나

 

“출항하기 전에 한번 오세요. 두 박스 드릴게요.”

 

말하고 말았다. 엉겁결에 이념보다 먹는 문제가 먼저 송 선장의 의식에 자리를 잡았다.

 

앗, 실수? 아니다.

 

배 타는 사람들은 순진하니까. 바다는 속이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의 변함없는 자연관이다.

 

소련 선원은 행복할지 모른다.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리니까. 선장은 여성 비서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공산이념이 퇴색해지고 경제관념이 깊어지면 무작정 많은 선원을 태우고 다니는 것이 국가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50명의 선원은 선박의 근대화와 자동화로 인하여 1년에 평균 한 명씩은 줄여나가야 될 테고.

 

한국 선교의 진앙지 볼티모어에서 두 단군의 여성 자손은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들이 섬기는 절대자에게 충성하며 살아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