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캡틴 지휘봉 잡다

캡틴 지휘봉 잡다

오선닥 2012. 3. 8. 08:24

70년대가 저물기 전에 송대길이 별을 달았다.

신분 상승은 아니고 삶의 변화가 약간 있었던 것.

사무실 책상은 후배한테 넘겨주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 손에 선장의 지휘봉을 들고…….

 

 

 

 

캡틴 지휘봉 잡다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별을 달았다.

송대길이 상선 선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선장이라는 별을 달기 위해서 시험을 치렀고, 그 시험은 역사적인 최초 객관식 시험이었다. 객관식이라고 얕보지 마라. 주관적으로 봐주기가 가능했던 주관식 시험 시절이 좋았더라. 연필만 구르면 되겠지 하고 퍼질어 놀다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광경은 참으로 코미디 같다.

 

추풍낙엽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과거시험 치러 갈 때 꼭 문경 새재를 넘는다고 한다. 한양으로 가는 고개는 추풍령도 있고 죽령도 있는데 말이다.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어감 때문에, 결국 수험생은‘좋은 소식을 듣기 위해’ 문경(聞慶)을 지나간다나.

 

짠물 마실 만큼 마셨는데 굳이 선장시험까지 칠 필요가 있느냐고? 국제 STWC 규정이 그렇다니까 따를 수밖에. 세계는 이미 국경을 넘어 글로벌이잖아. 영해라도 배가 다니는 물길은 외국선박에게 가능한 한 ‘안정통항’을 보장해야 한다는 국제법이 있지 않나. 모두가 해운의 국제성 때문이다.

 

 

부임한 배에 인사를 했다.

 

“본선에 승선한 것은 귀한 인연입니다. 이 만남은 저의 인생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선장으로서 첫 둥지를 터는 곳이 본선이기 때문입니다. 좋든 싫든 앞으로 열 달은 본선이 저의 집이요 사무실입니다. 가족으로서, 또 동료로서 즐겁고 안전한 선상생활이 되길 바랍니다.”

 

선원들은 ‘둥지’라는 표현에 동의하기 곤란하다는 눈치다.

 

“신임 선장은 바다를 ‘숲속’으로 생각하나?”

“우리는 새가 아니고 ‘선원’인데……. 하다못해 갈매기쯤으로 생각한다면 몰라도.”

 

신참이 참 딱하게도 너무 낭만적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으며, 사람에겐 가족이 있지 아니하냐.

 

같은 배를 타는 운명공동체로서 가족임을 강조하고 싶었는데…… 표현이 짧아서.

그는 문학가가 아닌 해기사가 되길 잘했다는 자위가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젠 이상이 아닌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현실은 순간순간, 구석구석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팔 정신도 없지만 한순간도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

 

 

전임 선장과 업무 인계인수가 시작되었다. 귀국 선원 일행이 KAL을 타고 무사히 한국에 도착한 후에도 전임 선장은 배에서 사흘을 더 머물렀다. 신임 병아리 선장을 위해 회사가 사흘의 동승(Doubling) 기간을 배려한 것이다.

 

함께 순회하며 열심히 메모하는 송 선장─ 왜 그리 질문이 많은지. 식사중에도 그의 질문 습관은 개에게 주지 못했다. 선배의 말 한 마디라도 더 뽑아내려는 진지한 모습……. 처음에는 다 그런 거야, 묵살해 버리기엔 너무 성실해 보인다.

 

전임 선장이 가족상봉의 꿈에 부풀어 사닥다리를 가볍게 내려갈 때, 배에 남은 후임 선장은 앞으로 열 달을 날짜로 쪼개 세기에 들어간다. 좀 더 지나면 날짜를 밥그릇 수로 쪼개 셀 것이다.

 

동짓날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님 오신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황진이는 시간을 일부러 늘이려고 했는데 뱃사람들은 자꾸 줄이려고 하니…… 직업의 장난인가. 시간만 축내는 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갑판, 기관, 통신, 사주(司廚) 등 모든 부서를 방문 순회했다. 대통령의 부처 순회 같은 것으로 상상하지 마라. 선장의 순회는 가족의 일환으로 등록했다는 신고식 정도로 봐주면 되겠다.

 

기관실에선 기관부 전원이 주기(主機) 정비를 하고 있었다. 정박기간에만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에 총동원되어 땀 흘리고 있었다.

 

송 선장은 기관원들에게 시원한 콜라를 한 캔씩 돌렸다. 스패너나 렌치로 도와줄 수 없는 한 이런 것도 돕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배마다 부속품 조달이 원만하지 않아 선박과 회사 간 승강이를 벌일 때가 있다.

 

“기관장님, 필요한 엔진 부품은 하시라도 말씀해주세요. 회사에 적극 요청하겠습니다.”

 

애송이 선장이 제법 당차네. 기관장의 생각.

 

“부품은 아예 개수를 늘려서 주문하곤 해요. 깎일 걸 예상하고…….”

 

“앞으론 필요한 대로만 주문하세요. 제가 회사에 잘 얘기해서 다 보급 받도록 하겠습니다.”

 

해군의 직업군인 출신답지 않게 온화한 성품의 기관장은 그래도 신참 선장이 마음에 들었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람 같아서. 그런데 정말 가죽 백이라도 있나,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배란 방향만 잡아준다고 가는 것은 아니다. 엔진을 돌려줘야 한다. 그래서 선장과 기관장은 죽이 맞아야 한다.

 

 

조리 부서는 청량음료와 같다고나 할까.

사람에겐 세 가지 큰 욕심이 있다고 했거늘, 식욕도 그 중 하나라면, 사실 배에서 먹는 재미밖에 더 있냐. 식당 메뉴는 패션만큼이나 다양해야 하고, 입맛을 잃은 선원에게는 별미도 제공해야 한다. 하긴 이삭이 별미 좋아하다가 아들 야곱한테 속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가족의 빈 공간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데 식사가 그 역할을 할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집을 떠나 있으면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법인데, 먹는 낙이라도 있어야지요.”

 

신임 선장이 진지해지려고 하는데 조리장의 대답은 엉뚱했다.

 

“야식을 너무 많이 먹어 살찐 선원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 가난해서 못 먹었던 거 기억나세요? 실컷 먹도록 놔두세요.”

 

하루 일인당 5달러 식대로 ‘포식’이 가능할까, 라는 조리장의 유심한 표정이 이해간다고 하겠으나, 위스키 한 병에 일 달러라고 한다면 이만한 식대도 적은 액수는 아니다.

 

송 선장은 대항해시대의 수난 역사를 떠올렸다.

 

“장기항해의 최대 고민은 비타민 부족인데, 일본 출항 전에 싱싱한 야채를 많이 실어 놓으세요.”

 

콜럼버스도 그랬고 마젤란도 그랬듯 옛날에는 괴혈병으로 많은 선원들을 잃었다.

 

 

배에 통신사가 두 명씩 근무해야 하느냐는 여러 사람의 궁금증이다.

 

─ 모르스부호를 두드리는 데 손가락이 아파서?

─ 통신실에 혼자 있기가 심심해서?

─ 주야간 무선 청수(聽守) 때문에?

─ 비밀 전송 감시를 위해서?

─ 선장의 업무 보조?

─ 통신사 노조 때문에?

 

어느 것도 이유가 아니다. 통신 본업 외 입출항 수속 정도가 규정 업무에 포함된다. 그냥 관례가 그랬으니까가 답일지 모른다. 구조조정이란 말이 나오면 제일 먼저 대상이 될 수 있는 위치다.

 

통신국장에게 질문하는 송 선장.

 

“국장과 차장은 당직교대는 어떻게 하십니까?”

 

“적당한 시간을 정해 2교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다음 질문에 들어갔다.

 

“선원 개인 전보가 많나요?”

 

“전보료가 비싸서 많지는 않구요. 가능하면 회사를 통해 가족들에게 소식 전하고 있습니다. 육지와 가까워지면 가끔 전화를 사용하기도 합니다만.”

 

그렇구나.

 

“메모해 드리면 전보문 작성은 쉽게 하시죠?”

 

“워낙 영어가 짧아서…….”

 

괜한 질문 했나. 선박에서 발송되는 모든 전문은 선장 책임인 줄 알면서.

 

 

이 회사의 특징은 선장이 직접 경리회계를 담당한다는 점이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회사의 경영방침 때문에 항해사나 통신사가 맡지 않고 전적으로 선장이 관리한다. 가계부조차 적어본 적이 없는 송대길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위안이 되는 것은 휴대하기 편한 경리 매뉴얼 책자가 있고, 항목마다 거기 따르는 영수증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지침서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대변(+)과 차변(-)의 합을 제로로 만들어라’

 

전임 선장이 남기고 간 말이 기억났다. 말이야 쉽지만 이걸 맞추지 못해 하루를 허비했다는 선장도 있었단다. 물건의 주인이 바뀌면 곤란하지 않겠어? 원리라고 할까.

계산의 문제도 있다. 주판은 서툴고, 그나마 톱니바퀴로 작동하는 기계식 계산기가 사라지고 손바닥 두 개만한 전자계산기가 나왔다는 것은 시대를 잘 타고난 복이라고 해야 하나.

 

 

 

* * * * * *

 

일본 나고야에서 자동차를 선적한 배는 미국을 향해 출항했다.

항만 도선사가 하선했을 때 송대길은 갑자기 외로움을 느꼈다.

 

최고책임자 = 고독 덩어리

 

이제 정말 선박 사령관으로서 고민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

 

첫 시험대에 오른 것은 일본 섬이 시야에서 벗어난 직후였다. 고정시켜 놓은 키가 불안하게 떨렸다. 정침해놓은 코스대로 배가 가지 않는 것이다. 신임선장의 대응능력을 시험하는 것 같았다. 선교에서는 원인을 찾을 수 없어 기관장에게 연락했다.

 

“혹시 선미 조타실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기관장이 수긍하고 조타실로 내려갔다.

 

원인은 솔레노이드 밸브의 접촉 불량. 작은 전자밸브 하나의 이상이 덩치 큰 선박을 통 채로 흔들어 놓은 것이다. 원래 조타기(Steering Gear)는 선미의 우측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스티어링보드(Steering Board)가 스타보드(Starboard)로 발음되어 오늘날 ‘우현’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자동차를 적재한 배는 가벼워서 물 바깥으로 많이 나와 있다. 공기중으로 나와 있는 배의 높이를 사람들은 에어드래프(Air Draft)라고 하더라.

 

“바람을 많이 받으니 선체를 물속으로 좀 가라앉혀야겠습니다.”

 

일항사의 의견대로 밸러스트탱크에 바닷물을 집어넣었다. 연료탱크와 청수탱크만으로는 흘수를 깊게 하기에 부족하니 바닷물을 펌핑해 배의 무게를 늘린 것이다.

 

배는 해류의 방향으로 얹어 놓는 것이 속력에 보탬이 된다.

대양에서 해수는 쉴 새 없이 흐른다. 해수는 밀도에 따라 침강하거나 용출해 거대한 대류현상을 일으킨다. 기온은 수온에, 수온은 해수 밀도에, 해수 밀도는 결국 해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그린란드에서 가라앉은 심해 해류가 북태평양에 도착하는데 무려 2000 년이 걸린다는 이야기?

 

 

바로 옆으로 고속 컨테이너선이 지나갔다. 넓은 바다에서 이런 일은 간담을 써늘하게 한다. 삼항사가 항해등 색깔을 혼동한 것이다. 색맹이 아닌데.

 

비행기든 배든 좌측에 홍등, 우측에 녹등을 켠다.

 

‘우측에 홍등을 보는 배가 피하라’는 규칙은 잘 정해 놓은 것 같다.

 

우측에 홍등을 보았다는 것은 상대선이 본선의 선수 방향으로 항진하고 있다는 뜻이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선은 우측으로, 즉 상대선의 선미 쪽으로 변침(變針)해야 한다. 많은 배들이 근접 상태에서 당황하여 선수를 좌측으로 회피함으로 해서 충돌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제해상충돌예방규칙은 좌측 변침을 극히 금지하고 있다.

 

야간에 배가 등을 켜지 않는다든지, 등을 켜더라도 색깔이나 광도가 들쭉날쭉 하고, 또 아무 높이에 달아 놓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 대형선과 소형선

- 동력선과 범선

- 상선과 어선

- 독립선과 예인선

- 항행선과 정박선

 

등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태평양이 태평한 어느 날.

 

인간적인 고뇌를 강요하는 상담거리를 들고 방문을 두드린 사람이 있었다.

갑판수였다.

지난번 배에서 승진이 누락돼 불만이 쌓였던 차에, 이번에 임신한 부인이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기가 바다 밑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상태다. 같은 날에 입사한 친구는 일 년 전에 갑판장이 되었는데, 자기는 지금 이렇게…… 기분이 말이 아니다.

 

비록 선장이지만 송대길이 같은 연배의 갑판수에게 위로해줄 수 있는 말은 극히 제한돼 있다. 남의 말을 빌려야 했다.

 

‘성공은 차라리 늦을수록 좋다’

 

왜? 일반적으로 빠른 성공은 사람의 나쁜 성질을 잡아 일으키고, 실패는 좋은 성질을 키워 나간다고 해서 말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만족하게 되고, 그 만족은 실패를 낳는다는 말도 그럴 듯하다. 인생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때는 순풍이 불고 있을 때라고 하지 않았나.

 

선택되는 사람은 ‘행운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다. 스스로 행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결국은 행운을 쥐더라는 것.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생각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덕목이다. 모험이라는 것도 이런 데서 나오는 것. 선원들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얼굴에 풀이 좀 먹여져야 한다.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다시 한 번 건강한 아이를 시도해보세요.”

 

남자들은 시도만 하면 아이의 창조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러나 달리 들려줄 말이 없었다.

 

인사기록카드 작성에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 위해 감정의 비계를 빼고 이성을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공정한 인사는 통솔에 보이지 않는 힘이 되니까.

 

 

하늘과 바다에 침묵이 가득하고, 밤바다가 어둠을 흔들 무렵 배는 파나마에 도착했다. 선장의 첫 임무로서 가장 긴장되는 부분이 기다리고 있다.

 

앵커를 놓는 일이다.

 

선장 진급을 해서 누구나 갖게 되는 공통적인 불안감일 것이다. 떨어뜨린 앵커가 바다 밑 진흙에 제대로 박혔는지 긴가민가 심정이어서.

 

앵커는 잘 박혔다. 내일 아침이면 운하를 통과할 것이다.

 

단순한 일에서 자신감을 가질 때 복잡한 일에 진입할 수 있다는 진리로 인해 송 선장은 정박 대기중 내내 마음이 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