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기사 헌팅

해기사 헌팅

오선닥 2012. 3. 2. 07:13

총 들지 않은 치열한 사냥이었다.

70년대가 저물기 전 해기사 부족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선박회사 선원 담당자는 배를 운항하는 해기사 헌팅에

밤잠을 설쳤다.

이 무렵 선원과장 직책을 맡은

송대길이 해기사 사냥에 나가느라고 촌음을 불태웠다.

미인계를 동원하진 않았지만…….

 

 

 

 

 

해기사 헌팅

 

 

 

노루 사냥도 아니고 꿩 사냥도 아닌, 사람 사냥이 시작됐다.

그것도 해기사 사냥.

 

 

육지 사람들은 해기사가 뭔지도 잘 모른다. 어쩌면 운전기사나 토목기사와 비슷한 거…… 뭐 그런 거 있지 않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바다에서, 나아가 배에서 제법 중요한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선원가족이거나 친척 혹은 친구일 것이다.

 

 

이런 해기사가 부족하다고 지금 부산 바닥에서는 야단법석이다. 체포조를 만들어서라도 해기사를 데려와야 한다고 선박회사마다 법석에 아우성이다.

 

 

송대길이 해기사 체포조 구성의 명을 받았다.

 

 

그가 어떤 연유로 해서 자신의 체질에 어울리지 않는 이런 업무를 맡았는지 궁금하지도 않나?

 

 

그동안 배 좀 탔다고 송대길은 해륙 순환근무 리스트에 올랐더랬다.

 

 

“이제 마누라 엉덩이도 두드리고 얘들과도 좀 놀아줘야 되지 않겠어?”

 

 

해무담당 상무의 배려 있는 말이었다. 송대길의 의중을 정확히 뚫고 소망을 불어넣어주는 말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은 송대길이'배만 탔는데 결혼은 언제 했어?' 라는 질문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딱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겨자씨만한 재주는 숨어 있었는지 고무신에도 제짝이 생겼다. 일이 되려는지 승선하기 전, 친구의 친구 소개로 잠시 커피 테이블을 마주하고 몇 마디 나눈 것뿐이었는데 그것이 인(因)이 되고 연(緣)이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 아버지는 해산의 고통을 아내와 함께 나누지 못했음에 항상 미안한 감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빚을 갚을 때가 되었나.

 

 

선원과에 송대길의 책상이 마련되었고, 머릿결이 유난히 고운 신정아 씨의 뒷모습을 보며 근무하는 숙명이 시작됐다. 향수 냄새도 괜찮았고 손톱의 매니큐어도 괜찮았으나 간혹 손톱 깎는 소리는 듣기에 좀 그랬다.

여름이 오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페디큐어가 예술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았고, 멀리서 볼 때는 더 예뻤다.

 

 

해기사 헌팅이 금세기 최우선 업무가 됐다. 선박 수효가 늘어난 탓도 있지만 정부가 해기사 수요 예측을 잘못한 게 근본 원인이다.

업무에 경험 많은 정아 씨의 도움이 컸다.

 

 

사냥 후 사냥감을 놓고 한잔하게 되듯, 해기사 헌팅 후 한 잔이 두 잔, 두 잔이 석 잔 되다가 송 과장의 귀가시간이 자꾸 늦어졌다.

두 번째 아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주지육림에 절여 있으니 세상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는데.

 

 

 

 

바다가 전장(戰場)이라면 회사 사무실은 작전본부랄까.

사무실 벽에 걸린 세계지도 위에는 쉰 여 척의 선위(船位)가 촘촘히 마크돼 있다. 군 작전본부 상황판을 방불케 한다.

 

 

작전본부에 놓인 책상 하나가 주인공 송대길을 위한 공간.

한 평도 안 되는 책상이지만 중요한 인적 사항들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명절 때 갈비짝이나, 하다못해 돌김 짝이라도 들고 와서 청탁 비슷한 것을 의뢰할 법한데…… 도통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청탁이 아무 문이나 두드리나? 꿈 깨라. 청탁은 고사하고, 밥 사주며 해기사를 청빙해 와야 하는 일만 없어도 다행이다. 선원의 고통을 이해하라.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으면 안 된다.

 

 

누가 이역만리에서 부르짖고 있는 것 같다.

 

 

뜨거운 모래 위에서 삽질하는 근로자.

피 묻은 거즈를 만지는 간호사.

소금물 위에서 땀 흘리는 선원.

 

 

가족과 멀리 떨어져 이국에서 달러를 열심히 벌어들이는 사람들을 좀 주목하라.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는 그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철저히 감사해야 한다.

 

 

회사 내 책상 하나가 주어지니 이제 인간이 누리는 보편적 삶의 대열에 끼어들었다고 송대길은 자긍심의 분출을 느꼈다. 신기한 것은 아내가 더 감동적인 동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용두산 중턱에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부산항을 내려다보며 그녀는 말했다.

 

 

“부산항 바다가 저렇게 잔잔한 적은 없었어요.”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바다에 나가있는 남편을 걱정하던 마음의 수고가 이제 사라졌다는 뜻인가. 송대길도 어딘가 평화를 실감했다. 마치 바다에 떠 있는 기분으로 돌아갔다.

 

 

“바다가 잔잔하니 내 마음도 행복하오.”

 

 

이불 속의 따뜻한 행복을 바쁜 회사일로 망칠까봐 두렵다.

 

 

 

 

사무실은 부산시 중구에 위치해 있다. 중구 없는 도시는 앙고 없는 찐빵과 같은 것일 진데, 그 중구에 제일 멋진 건물이 있었으니, 그 건물의 중간 층 쯤에 작전본부가 있다.

철판만 딛고 개미 쳇바퀴 도는 무료한 선상 생활과는 사뭇 다른 생활이 시작되었다.

밥 먹고 넥타이 메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슥 훑어보고……, 멋있는 자신을 확인한 후 집을 나와 포장된 도로를 걸어서 사무실로 향하는 모습은 평범한 사람이 일상에서 얻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도보 출근이 가능한 곳에 집을 마련한 것은 ‘타는 것’을 피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그것이 자동차든 비행기든 배든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땅의 냄새를 맡고 나무의 결을 만지며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삶을 살고 싶을 따름이다.

 

 

출근 이틀째 아침은 이유 불문하고 즐거웠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인사하는 송대길은 스스로도 놀랐다. 지금껏 자신의 귀로 자신의 음성을 들어본 것 중에서 제일 밝고 맑았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송 과장, 어서 와요. 훈남이 들어서니 사무실이 광채가 나네.”

 

 

해무 부장은 송대길의 직분을 강조면서 모름지기 부하의 외모를 비행기에 태웠다.

약간 옆자리 책상에선 김 대리가 웃음을 머금고 일어나 인사를 했다.

 

 

“해기사 헌팅이 만만찮은데 앞으로 과장님께서 좀 바빠지실 겁니다.”

 

 

걱정해주니 고맙다. 김대리.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번에는 여직원 신정아가 자리에서 예쁘게 일어나면서,

 

 

“과장님의 책상이 제 뒤라는 것이 대단한 영광이네요……. 커피는 제가 서비스할 게요.”

 

 

당연한 걸 강조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고마웠다.

 

 

옆의 여직원들도 한 마디씩 인사를 거들었는데 시간상 다 메모할 순 없고…….

다만 바라는 건 이런 초심들이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변하질 않길.

 

 

 

 

 

 

 

* * * * * *

 

 

회사가 관리하는 선박을 운영하려면 육백여 명의 해기사를 포함해 이천 명 가량의 선원이 필요하다. 척당 서른 명 승선에다 휴가자와 교대 중인 자를 포함하면 그렇게 계산된다. 머리수가 이러니 선원관리가 어렵지 않겠는가.

 

 

업무 폭주로 인해 자연히 직원들의 퇴근시간이 들쭉날쭉.

숨 쉴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사무실은 자갈치시장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원래 육상 일은 이렇게 해야 하나, 할 정도로.

여직원들도 야식을 챙기며 퇴근이 9시를 넘을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시간외수당의 요구는 없다. 착한 미녀들이다.

 

 

‘용모 단정’이라는 조건을 걸어 여직원을 채용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많은 선원들을 상대하는 데 친근감을 보여야 한다는 남자들의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 작용한 것이다.

 

 

다소 부작용도 있다. 여직원 단속과 보호가 요구된다는 점. 까닭인즉, 휴가 나온 선원들이 커피 한 잔 대접하겠다며 데려나가 애인으로, 때론 신부로 낚아채 가기 때문.

 

 

 

 

예견치 못한 스트레스 폭발 사건이 출근 시작한 지 보름 만에 발생했다.

업무 과다가 아닌 다른 데서 터졌다. 회사가 수라장이 돼버린 사건이다.

 

 

유조선에서 3명의 선원이 유류탱크 내에서 질식 사망한 사고가 생겼다.

빈 탱크 내를 제대로 환기(Gas free)시키지 않고 들어갔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배는 가까운 항구 싱가포르 항으로 이로(離路)해서 사망한 선원을 양륙시켰다. 시신은 이튿날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했다.

 

 

사고 이틀 째 송대길이 간밤의 피로 누적으로 사무실에 늦게 도착했을 때 한 여직원이 문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깡패 무리가 와서 유리창을 깨고 문을 다 부숴버렸지예.”

 

 

그러고 보니 앞문이 박살나 있다.

사무실 안쪽에선 낯선 사람 무리가 보였다.

 

 

사고 보상 문제로 옥신각신 하는 사이 유가족 대표라는 자가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말이 유가족 대표지 동원된 깡패였다. 박 대통령은 학생데모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개인생활 관련 폭력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주먹이 더 효과적이었을 때였다.

 

 

공포 분위기에서도 해무 부장은 작은 신체 크기를 극복하는 담대함을 보였다.

 

 

“일본 회사는 법대로 하자고 하지만 우리가 좀 더 고려해보겠습니다. 기물 파손이 커지면 경찰이 알게 되고, 그러면 더 일이 복잡해지니 진정들하십시오.”

 

 

부장의 말에 이성을 좀 찾았는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닦으며 깡패 대표는 다소 조용해졌다. 맞받아칠 수 없는 송대길은 불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달래야만 했다.

 

 

일본 선원이 똑같은 사고를 당했다면 그 가족은 '회사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고 사죄하곤 한다. 한국인의 문제해결은 우선 목소리부터 올리고, 이어서 주먹을 앞세운다. 한국인의 고소 건수가 일본인의 13배나 된다는 점에서 여실히 대조된다.

 

 

 

 

일이 터질 때는 연발하는 습성이 있는가 보다.

선원이라는 직업은 종종 여자문제와 상충할 때 해결의 고리를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 청년 하나가 회사로 찾아왔다. 다짜고짜 송 과장 앞에 나타나 사진을 내밀며 ‘이놈’ 하선시켜 달라고 아우성이다. 사진의 주인공은 현재 함부르크 항에 정박해 있는 선박의 이기사이다.

송 과장은 우선 청년을 진정시켜 놓아야 했다.

 

 

“이 사람은 사흘 전에 출국했습니다. 일단 승선하면 계약기간은 채워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설명인즉슨 여동생이 호텔에서 애인과 숙박하고 나오는데 한 남성과 맞닥뜨렸다는 것이다.

 

 

“어, 창식이 아냐? 휴가 왔다는 이야기 니 마누라한테 들었다만…… 언제 하선했어? 이 여성분은 회사 직원이야?”

 

 

여동생은 애인이 유부남인 걸 알게 되자 충격으로 기절할 뻔했다.

간밤 호텔방에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낸 상대가 마누라가 있는 유부남이라고? 미래의 행복을 설계하며 다음 하선 때 결혼까지 약속했는데…….

 

 

며칠 후 이 사실을 여동생으로부터 들은 오빠로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뺑소니친 남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회사를 찾은 것이다.

 

 

송 과장은 도덕성이 형편없는 선원을 계속 승선시켜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하선 귀국하는 방법이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겨우 청년을 달래서 돌려보냈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

 

 

만취 선원이 배와 부두 사이에 떨어져 허리 다친 사람

방수문 개폐 중에 손가락이 치인 사람

엔진룸의 기계 톱니바퀴에 손이 걸린 사람

메어둔 밧줄이 터져 다리를 다친 사람

사다리를 타고 페인팅 작업하다가 실족한 사람

외박해서 비밀병기에 고름 터지는 사람……

 

 

정말 종류도 다양하다. 해무․선원 담당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 순서 없이 기다리고 있다. 제 명에 살다가 죽기를 허용치 않는 것들이다.

 

 

막 퇴근을 준비할 무렵 선박에 전문을 부탁하는 급한 전화 한 통이 왔다. 선원 가족 부인의 전화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급히 귀국 바람>

 

 

부인이 부탁한 전보문은 광석선에 승선 중인 남편 일기사에게 보낼 것이었다.

고인은 회사 직원들에게 꽤 많이 알려져 있는 치매 환자였다.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며느리 앞에서 바지를 벗는 바람에 며느리 혼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자식이라곤 하나뿐이니 귀국시키지 않을 수 없다.

 

전보문이 작성됐고, 그리고 타전됐다.

 

 

“Congratulation, 1st Engineers father passed away. Please repatriate home while passing Dubai(축하, 일기사 부친 별세. 두바이 통과시 하선 요망)."

 

 

전문은 대부분 영어로 작성된다. 외국 선주가 참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미 눈치 채신 분은 챘겠지만 결정적인 실수가 터져버렸다.

 

 

‘Condolence(조의)’를 ‘Congratulation(축하)’로 잘못 나가버린 것이다.

 

 

타전 중지를 위해 즉시 서울무선으로 연락했으나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바쁠 때 둘러가지 않은 결과는 이렇게 엄청났다.

고인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못난 자의 죄를 용서하소서!

 

 

 

 

* * * * * *

 

매년 입춘이 다가오면 진해 군항은 사뭇 분주해진다.

4월 군항제 준비 탓도 있겠지만, 해군 복무자들의 제대 철을 앞두고 해기사를 입도선매하려는 선박회사들의 맹렬한 유치작전이 5만 인구의 작은 시를 흥청하게 만든다.

 

 

점입가경인 것은 한 명의 해기사라도 더 확보하려고 손자병법까지 동원한다는 점이다. 미인계를 쓰는 회사까지 있다니.

<나를 사랑한 스파이> 영화를 흉내 내나.

 

 

송 과장 일행은 예비 제대자들을 사냥하기 위해 진해로 가고 있는 중이다.

 

 

사냥감은 대체로 사전에 정해 놓은 상태지만 그들을 어떻게 몰이하느냐에 따라서 사냥의 성과가 달라질 것이다.

사냥감의 몰이 장소는 화려한 룸이나 유곽이 아닌 평범한 음식점으로 했다.

미인계 작전보다는 술이라는 최면제에 더 의존하기로 했다. 대신 비싼 술이라도 충분히 공급하겠다고 상무의 승인이 버팀목이 됐다.

 

 

송 과장 자신은 오늘 충분히 술과 친할 준비가 돼 있고, 술의 위력에 의지해 젊은 군인들과 최대한 친구가 되어줄 준비도 돼 있음을 확인했다.

 

 

'정말 회사를 잘 선택했다.' 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순순히 나와야 한다.

 

 

회사 승용차를 대동시킨 이유도 술자리 이후의 뒷감당을 기사 아저씨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오로지 젊은이들의 접대에 올인하겠다는 뜻이다.

 

 

차가 진해 시내로 들어서자 뒷좌석에 앉은 송대길이 차 방향을 안내했다.

 

 

“최 기사님, 곧장 청진장으로 가시죠."

 

 

진해 바닥은 돋보기로 보듯 훤하다. 물오른 청춘의 일 년을 여기서 바친 몸이 아닌가.

 

 

송 과장 옆에 정아 씨가 앉아 있다. 그녀는 길가 양쪽에 늘어선 벚꽃나무를 보며 마냥 신기해했다. 그루트기가 껍질을 깨고 금방 싹이 돋아날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자신의 몸도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 기분이었다. 앞가슴을 지긋이 눌러보는 손바닥에서 무언가 봉긋봉긋 솟는 기분이 느껴져 부끄럽기도 했다.

 

 

여직원이 동행하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글쎄── 그냥 데려가고 싶었다. 다른 회사는 미인계도 쓴다는데 여직원이라도 참석시켜 젊은 군인들의 기분을 부드럽게 해주고 싶은…… 그런 거였다.

 

 

무엇보다 순순히 동행해준 정아 씨가 오늘따라 고맙고 귀여웠다.

 

 

"총각 장교 열 명의 시선이 정아 씨에게 집중돼도 감당할 수 있겠지?”

 

 

송 과장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기를 머뭇거리지 않았다.

 

 

“저는 그냥 서류만 챙겨드릴게요. 그리고 과장님 과음하지 않도록 몇 잔은 제가 몰래 마셔드릴 수도 있고요.”

 

 

그녀의 재치 있는 대응전략에 감사할 일이다.

 

 

사실 서류는 별거 아니다. 입사원서와 근로계약서에 서명 받아서 챙겨 놓으면 된다. 문제는 어린 여성이 피 끓는 머슴애 열 명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내느냐이다. 마가렛 대처 같으면 모르지만.

 

 

군인들 모두가 약속시간 십오 분 전에 도착했다. 뭐 이상할 거 없다. 그들의 시간엄수는 기타리스트의 손가락에 굳은살 박이는 만큼이나 체질화돼 있다.

 

 

정아 씨가 공손히 그들 앞에 섰다.

 

 

"선원과 신정압니다. 군인 오빠들, 잘 부탁드려요."

 

 

"와!"

 

 

군인들은 일제히 함성으로 답했다. 옆방에서는 무슨 야구중계인가 착각할 만큼.

정아 씨는 함성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태연했다. 그녀의 담력에 송 과장은 하마터면 '아?' 소리칠 뻔했다. 평소에 발견되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

군인들은 ‘뭐, 이런 아가씨가 다 있어?’라는 듯 그녀의 당찬 모습에 황당한 빛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빙 둘러 앉아 있는 군인들에게 서류 한 세트씩 돌렸다.

 

 

"입사 서류는 취중에 서명받기가 실례되고 해서……지금 서명 부탁드립니다. 괜찮으시죠?"

 

 

군인들은 그녀의 얼굴을 좌우로 스캔하면서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서슴없이 서명했다. 배멀미 체질 때문에 승선 여부를 결정하지 못한 한 명 외는 모두 입사 서류에 동의했다.

이 정도의 해기사 사냥이면 만족스럽다.

 

 

지금부터 술 마시는 일만 남았다.

 

 

혀가 말려들 정도로 마셨다. 브랜디 VSOP의 빈병이 자꾸 늘어났다. 군인 봉급으로 이런 양주를 마셔보는 것은 역사에 기록해둬야 할 사항이라고.

 

 

군인들이 질문 하나씩 술잔에 얹었다.

한 회사에서 열 명이나 데려가면 매점매석 아니냐? 탱커를 타면 머리가 빠진다던데 탈모방지약은 주느냐? 해륙순환근무는 가능하냐? 진급은 몇 년 만에 시켜주느냐? 결혼을 위한 중도 하선 시 여행비는 본인 부담이냐? ……등등.

 

 

그런데, 엉뚱한 질문도 나왔다.

 

 

“정아 씨 애인은 있나요?”

 

 

신상 질문에도 정아 씨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처럼.

 

 

“봄이 되면 나물 대신 애인 캐러 갈 거예요. 혹시 오빠들 관심 주시면 선착순으로 받을게요.”

 

 

열 명의 군인이 한 명의 아가씨를 당해내지 못하니,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

 

 

젊은 군인들은 하나둘 흐늘거리기 시작했다. 고주망태는 만민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밴드가 들어서자 젊은 군인들은 마이크 차지에 들어섰다. 쟁탈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정아 씨를 두고 포위 작전에 들어갔다. 함께 노래도 좋고, 춤도 좋다고 하면서.

 

 

야간통행금지가 없었고, 부산으로 돌아갈 사람이 없었다면 진해의 밤은 결코 끝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과장님, 제대해서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지금부터 외상값은 회사 이름으로 달아놓을게요."

여러 작별인사가 있었다.

 

 

정아 씨에게만 악수하고 송 과장에겐 아예 손도 내밀지 않는 작별도 있었다. 술기운에 누구에게 손을 뻗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니.

괘씸하다기보다는 즐겁게 놀아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 모두가 늠름해보였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송 과장은 정아 씨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아 씨, 속이 괜찮아? 내 술 받아먹느라고 힘들었지? 또 쏟아지는 시선들 피하느라고."

 

 

"전 피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즐겼어요. 모두들 제복이 멋있던데요."

 

 

그래, 선원과에 딱 맞는 여직원이로군.

 

 

"찜해놓은 중위 한 명 있어? 애인으로도 괜찮고……"

 

 

"오늘 사실 저도 좀 취해보고 싶었어요. 오빠들과 함께 놀고 싶었고."

 

 

"어느 오빠의 노래가 제일 좋았어?"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를 부른 정 중위님이 센티해 보였어요. 멜로드라마 주인공 같았어요."

 

 

이번에는 뜸을 들이고 엉뚱한 질문을 해보는 송대길.

 

 

"그럼 니 상관 송 과장의 노래는 어땠어?"

 

 

"편곡에다 자유곡의 명수 같았어요. 그런데 분위기 메이커로선……짱이더라구요.“

 

 

“짜장~! 그 소리 못 들었으면 오늘 집에 안 가려고 했어.”

 

 

이야기하는 중에 취기가 싹 몰려왔다. 정아 씨의 목이 힘을 잃고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늦었으니까 집에 바래다주셔야 돼요. 그리고 과장님이 댁에 가시고 안 가시고는 사모님 몫이예요.”

 

 

열 개의 전리품은 만족한 결과다. 사냥꾼과 몰이꾼의 협력이 환상적이었다고 자화자찬한들 비웃을 사람이 없다.

 

 

“정아 씨의 몰이꾼 역할이 먹혀 들어갔어.”

 

 

“그럼 오늘 사냥은 대체로 성공한 거네요.”

 

 

“그래, 사냥감 질도 좋았어. 실력파들을 낚은 것 같애.”

 

 

"사냥꾼과 몰이꾼의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을……"

 

 

잠시 멈췄다가, '까요?'를 마저 끝내지 못하고 정아 씨는 어깨가 허물어졌다.

 

 

차 안에 취기가 죽 깔렸다.

 

 

침묵.

남자의 왼쪽어깨가 왜 무겁나 했더니 여자의 머리가 쓰러져 얹혔다.

 

 

기인 침묵.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남자의 목에 감겼다.

 

 

기다라안 침묵.

여자의 상체가 남자의 무릎위에 쓰러졌다.

 

남자의 술기운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차체는 어둠을 가르고, 차바퀴는 열심히 꿈을 싣고 굴러갔다.

부산 시내 진입 무렵 뒷좌석의 두 사람은 생각이 멈췄다.

 

 

그 후의 일은 기사 아저씨가 처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