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건 교육 목적예요

이건 교육 목적예요

오선닥 2012. 1. 9. 10:25

호주, 뉴질랜드를 비롯한 태평양 섬들은 청정했다.

 70년대가 저물 무렵까지는 지구온난화 영향도 크지 않았다.

그러나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 일찍부터 기름오염 방지에 신경 썼다.

미 해안경비대의 선박검사가 까다로운 것은 당연...

 

 

 

 

 

이건 교육 목적예요

 

 

돈이 돌아야 경제가 돌아가는 것.

선박이 돌아야 화물을 나르는 것.

 

지루한 정박을 끝내고 기름을 가득 실은 배는 하와이에 도착했다.

특정한 항로가 없는 부정기선은 화물이 있는 곳을 부지런히 쫓아다녀야 한다. 이런 면에서 배는 너무 쉬었다. 일차적인 책임은 회사 영업부에 있고, 이차적으로 시황 악화에 있으며, 삼차적으로 선원에게 있다.

 

사실 선원들은 삼차는 고사하고 십차적인 책임도 없다. 회사 지시대로 따른 마당에. 누군 도덕적인 책임을 들이댈지 모르지만 이건 책임이 아니라 미안한 감정일 뿐이다.

 

하와이는 특별한 곳으로 기억된다. 적어도 선원 두 명에게는 그렇다.

여기서 그들은 흥미진진한 교육을 받은 바 있다.

내용이 뭐냐고?

 

상식적으로 거론되는 해양역사 교육이 아니다. 영국의 탐험가이자 항해사인 캡틴 쿡이 뉴질랜드와 호주 탐험에 이어 1775년 하와이를 발견했다거나, 또 태평양의 다른 많은 섬과 남극해와 베링해까지 탐험했다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해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만드는 데 그의 공로가 컸다는 내용도 아니다. 뱃놈으로 비하하곤 했던 한국의 담뱃대 양반님들이 일찌감치 구들장을 박차고 바다로 나왔어야 하는 반성적인 내용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교육의 빌미는 이랬다.

 

하와이로 항해하는 중 어느 오후.

 

해가 하늘 옆으로 걸려 있을 무렵 일기사와 조리원은 수영장 옆의 이동벤치에 누워 고추말리기를 하고 있었다. 막 수영을 끝내고 막간을 즐기는 중. 남쪽 섬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둘은 평소에도 친했다. 남자들만의 세계에서 고추 색깔이나 크기는 관심 밖이다. 다만 햇볕에 그을린 고추가 커피색으로 변할 무렵 일기사가 커피 생각이 났다.

 

“해삼아, 냉커피 한잔 하고 싶은데 어떡하지?”

 

어머니가 해녀여서 평소 해삼을 좋아했다는 조리원을 빗댄 호칭이었다.

조리원은 전혀 불쾌한 내색 없이 커피를 타서 쟁반에 올려 가져왔다.

 

“커피 맛이 괜찮으시면 쟁반에 잭슨 몇 장 올려놓으세요. 링컨은 안 됩니다.”

 

앤드류 잭슨 얼굴이 들어 있는 20달러지폐 정도는 돼야지 에이브러햄 링컨 얼굴이 들어 있는 5달러 지폐로는 어림없다는 시늉이다. 광복동 초원다방 김양이 갖다 준 커피보다 더 맛있을 거라고 하면서 지폐 올려놓기를 다그친다.

 

조리원의 서글서글한 표정은 언제 봐도 즐거움 그 자체다.

일기사는 그래서 그를 좋아한다.

 

“앤드류가 아니라 벤저민도 좋지. 차라리 하와이 입항하면 내 아주 기똥찬 데 안내해줄게. 이후 네 몸무게 빠지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어.”

 

평소 싱겁지도 않은 일기사의 말인지라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빠질 몸무게도 없으니 염려 놓으시고 약속이나 지키세요.”

 

조리원은 당당했다.

하와이 입항하자마자 일기사는 조리원을 대동하여 약속했던 대로 기똥찬 데로 안내했다. 조리원은 이 정도면 100달러지폐 벤저민 값어치는 있다고 평가해줬다.

 

안방 같은 무대에서 두 남녀가 능숙한 연기를 보였다.

 

“이것은 교육 목적예요.”

 

침대 옆에서 여성을 리드하는 남성의 코멘트였다. 일본의 스트립쇼와 비슷한 분위기지만 내용은 아주 다르다.

 

두 남녀의 누드.

 

남성은 여성을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면서 침대 매너를 건장한 몸으로 시범을 보였다. 무대 바로 앞좌석에서 연기자의 동작을 한 구석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는 한 동양인의 집중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남성 연기자는 이 동양인을 무대로 불러들였다. 조리원이었다.

 

무대에 올라간 조리원은 침대에 누워있는 하와이 원주민 여자 옆으로 안내되었다. 구릿빛 피부의 여자는 태연한 미소를 보냈다. 여자의 중심부는 피부색 내의로 입혀졌으나 비칠 것은 다 비쳤다.

 

“섬세한 동작은 사랑을 만들어갑니다. 자 보세요.”

 

남성 연기자는 조리원의 손을 이끌고 누워있는 여성 연기자의 몸 부위를 쓰다듬어 나가게 했다. 목덜미에서 발목까지. 굴곡을 따라, 그리고 S라인을 따라.

 

조리원의 손은 떨렸다. 탱탱한 피부를 따라가는 손끝이 튕겨서가 아니다. 조각품이 숨을 쉬는 것 같아 신기해서. 아니 이상한 감정이 믹스되어서.

 

조리원에게는 기분 나쁜 경험이 있다.

일 년 전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항에서 일어난 일.

 

시멘트 부대를 어깨에 메고 하역하는 인부들이 꽤나 건장해 보였다. 건장한 남자의 고민은 여자를 경험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인부들은 평생을 홀아비로 살아가야 하는 비극을 안고 있다.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부자들이 여자들을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커피타임에 한 인부가 조리원의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하이, 이것 좀!”

 

남자의 목소리에 조리원이 눈을 돌렸을 때 괴상한 물체가 조리원의 코앞에 우뚝 섰다. 놀랄 시간도 주지 않았다. 인부는 바지를 내리고 비밀한 것을 꺼내 힘을 주고 하늘로 세웠다. 그러고는 손으로 만져달라고 제스처 했다.

 

“포어맨에게 알릴 거야!”

 

조리원은 작업반장한테 달려갈 자세를 취했다.

겁을 먹은 부두 인부는 자신의 귀중품을 급히 바지 속으로 회수했다.

 

그 때의 상황과 지금 손아래 벌어지는 섬세한 동작은 너무나 다르다.

남성 연기자는 조리원의 손을 놓지 않았다.

 

“사랑엔 동서양의 차이가 없습니다. 지구상의 인간은 같습니다. 동물들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지구와 우주를 포용합니다.”

 

남성 연기자의 멘트는 코스모 철학인지 몰라도 조리원은 그저 얼떨떨했다. 사랑은 우주가 아닌 자기만 포용하는 것 같은데.

 

고추에 힘을 죽이고 밤늦게 귀선한 두 사람은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해졌다. 이상한 종교에 도취된 기분 같은 것. 그러면서 만족한 듯 옆의 선원들에게 외출보고를 했다.

‘교육을 잘 받았다’고.

무슨 내용이냐고 물으면

‘단체관람의 가치가 있는 내용’ 이라고만 설명할 뿐.

 

 

 

 

 

  *****

 

 

화려한 하와이의 밤이 관광객들을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을 놓아두지 않는다. 해풍이 넌지시 부는 낮 시간도 섬을 찾는 손님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여지없이 와이키키 해변으로 데리고 간다.

 

북쪽에 산지를 끼고 있는 해변은 남쪽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해변은 혜택 받은 기후와 맑은 바닷물로 세계적인 관광지로 사랑받는다. 동쪽에는 분화분지 다이아몬드헤드가 있고 수많은 호텔과 별장이 늘어서 있다. 해수욕, 일광욕, 수상스키, 서핑 등을 즐기기 위해서 미국 본토와 여러 외국에서 관광객들이 일년내내 끊이지 않고 모여든다.

 

배에서 한 그룹 해변으로 나가서 모래를 밟았다. 주위 해변 경관을 부채꼴로 훑어 본 선원은 해운대와 비교했다.

 

“소문난 잔치 먹을 게 별로네. 해운대 해수욕장보다 작잖아.”

“해변의 호텔과 레스토랑이 멋있잖아.”

“모래사장은 작아도 비키니 입은 사람은 많구먼.”

 

여러 평가가 있었으나 대체로 감동할 만한 곳으로 의견 일치가 되었다.

1970년대 해운대는 모래사장이 길었고 모래가 푸짐했다. 허나 해변을 찾는 사람이 적었다. 여름시즌에도 해수욕객 붐비는 소리 대신 해변의 파도소리만 유난했다. 비치파라솔은 띄엄띄엄 몇 개만 있었을 따름이다. 여름휴가 때 해변을 찾기보다는 계곡물에 발 담그는 것이 좋았던 한국의 모습이었다.

 

여름과 겨울 두 계절의 기온차가 4도에 불과한 하와이. 연중 한국의 초여름 날씨다. 미국의 50번째 주로서 전략적 가치도 있겠지만 따뜻한 날씨가 섬의 가치를 높여준다. 인구의 칠 할 이상이 호놀룰루 섬에 모여 있다는 것은 관광객을 효과적으로 유치하기에 유리할 것이다.

민속촌, 화산, 국립공원 등 볼거리가 많다. 사탕수수 재배농장에는 원주민의 체취.

 

파도와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피서지에서 생긴 일>은 없었다. 파도를 만나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낼 기회도 없었다. 우선 파도가 세지 않았고 무엇보다 여자 상대가 없었다.

갑자기 익사할 뻔 한 여자 아이를 안고 나오는 남자는 훌륭해 보였다. 여자 아이는 사랑을 할 만한나이지만 임신하진 않았으니 영화 속의 피서지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의 여부는 아직 모른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 하와이>로 안내 받았으면 좋겠다. 수학여행 인솔자인 미모의 여교사와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삼일간의 항구 정박으로는 부족하다. 대신 엘비스의 노래나 듣고 가자. 교육 목적으로 수학여행을 왔건만 정작 교사는 로맨스를 만들어냈다는 영화.

어쨌든 하와이는 사랑을 제조하는 섬.

 

하와이의 해변 정취를 느끼며 톰 크루즈의 <칵테일>이나 한 잔 마셔보자. 스타급 바텐더로 출세를 해서 아름다운 자메이카 여성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빌보드차트에 오른 노래를 부르면 애틋한 사연은 더욱 오래 남을 텐가.

 

<더티 댄싱> 교사가 되어 17세 소녀와 사랑을 나누면 하와이는 더티(dirty)해 보일까. 영화는 소녀가 휴가를 계기로 사랑의 의미를 일깨워 가는데도 깨끗하지 못하다고?

사랑에 쓸데없는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

 

 

 

 

 

 *****

 

 

관광객들이 하와이를 찾는 것은 연중 따뜻한 날씨도 이유가 있지만 청정 해역의 이유도 있다. 태평양 섬은 대체로 환경에 예민한 지역들이다. 청정해역을 항해하는 배는 기름오염 관리가 중요하다. 입항하는 배의 검사가 까다롭다. 해안경비대는 항해일지, 유류기록부 등을 꼼꼼하게 점검했다.

 

호주에서 하와이로 오는 길은 무역풍대를 지난다. 무역풍대에서 해류와 바람을 맞받고 항해하나 약한 바람으로 선내 작업이나 훈련하기에 좋다.

 

또 조용한 바다를 항해하다보면 일상의 지루함이 덮친다. 선원들은 지루함과 때론 전쟁을 치른다. 선박의 비상약품 목록엔 우울증 약은 없으나 우울증 퇴치에는 훈련요법을 쓴다.

이는 마치 바다에 폭풍이 몰아쳐 바닷물을 뒤집어 주는 효과와 같다. 바다 깊숙이 산소를 공급해주니까. 논밭을 쟁기로 뒤집어 흙을 갈아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훈련은 분위기를 뒤집어준다. 바다가 너무 잔잔해도 해상생물에는 좋지 않듯 선내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온갖 잡념이 비집고 들어온다. 이때 뒤집기로 들어간다.

 

소화방수훈련, 인명구조훈련을 놓칠 리가 없다. 이런 훈련은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하는 의무 중 하나다. 선원법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 분위기 변화도 부수적으로 따라온다.

 

실시한 훈련은 항해일지에 기재해둬야 한다. 항해일지 기재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은 사고가 났을 때 뼈 속 깊이 실감한다. 해난심판 등 재판의 기준은 증거이고, 증거는 문서 등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육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시의 교량 붕괴 사건으로 공무원이 줄줄이 검찰에 잡혀갔을 때 유독 고위공무원 한 명만 풀려난 적이 있었다. 풀려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건설일지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두어 당시 상황을 빈틈없이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증거 찾기가 어려운 해상에서는 증빙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구명정갑판에 모든 선원이 집합했다.

구명정 안의 비상식량, 구명장비들을 점검하고 구명정을 강하했다. 배를 정지한 상태에서 구명정 강하훈련을 해야 한다. 구명정 한 척의 값이 수억인데.

주위 바다에 타선박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신호탄이나 연막탄도 쏘아본다.

훈련은 정직해서 수행한 만큼 보상해준다. 때로는 피로, 때로는 생명으로 보상해준다.

승무원이든 승객이든 모든 사람은 인명구조훈련에 임할 의무가 있다. 다만 훈련내용의 차이일 뿐이다. 비상식량은 조난당한 사람이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양이 적으면서도 영양가 높은 식품으로 한다.

 

위험화물을 싣고 다니는 배는 특별히 화기에 주의해야 한다. 화재예방과 소화훈련 모두 중요하다. 선원 거주구역에는 오직 두서너 군데의 흡연소만 허용된다. 재떨이는 항상 물이 깔려 있어야 한다. 성냥이나 라이터를 몸에 소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입고 다니는 옷은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사용하는 연장은 방폭재로 돼 있고.

 

석유가스는 무게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기도 하고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특히 원유에서 기화되는 가스들은 주로 공기보다 무거워 갑판상에 가라앉아 화기 접근시 폭발위험이 많다.

 

가스의 무게를 공기와 비교하는 것은 간단하다. 분자량 계산으로.

 

공기(질소 79%, 산소 21%) = 28*0.79 + 16*0.21 = 28.8

LNG(메탄: CH₄) = 12 + 1*4 = 16

LPG(프로판: C₃H₈) = 12*3 + 1*8 = 44

 

공기보다 무거운 LPG가스는 아래로 가라앉아 구석구석 박힌다.

싱크대 밑에, 책상 밑에…… 때로는 갑판 창고 밑에.

화기가 접촉하면 뱀이 혀로 먹이를 낚아채듯 불꽃을 끌어당겨 수백 배로 팽창 폭발한다.

공기보다 가벼운 LNG가스는 대기 중으로 날아가버려 덜 위험하나 폐쇄된 실내에 쌓이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의 목적이라 해도 생사를 시험할 수 없다.

훈련을 하라.

 

 

 

 

 

 

  *****

 

 

지구의 남반구는 원래 모습이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태평양 남쪽의 호주와 뉴질랜드가 그렇다.

특히 뉴질랜드는 환경보존에 우선순위를 뒀다. 얼마동안 이민도 백인만 받아들였다. 다른 색깔 인종이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믿음은 아닐 텐데. 핑계는 무덤처럼 만들면 된다.

 

뉴질랜드는 북섬과 남섬으로 크게 나뉜다. 한반도보다 약간 크면서도 인구는 400만에 불과하다. 남섬이 약간 크지만 인구의 3/4은 북섬에 거주하고 1/4만이 남섬에 거주한다.

 

1642년 네덜란드 탐험가 타스만이 처음 남국이라 불렀지만 뒤에 네덜란드의 한 지명을 따서 뉴질랜드로 변경했다. 1769년 영국선장 쿡이 이곳을 탐험한 이래 유럽인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마오리족(族)을 비롯하여 원주민은 인구의 1/10정도다.

유니온잭에다 남십자성을 그려 넣은 국기는 남쪽 밤하늘의 정취를 살린 것이라고.

 

반 년 전 오클랜드 항에 입항했을 때의 긴장은 잊을 수 없다.

 

기름오염에 대한 노이로제.

선외밸브를 폐쇄한다는 것이 오히려 열어뒀던 어처구니없는 상황. 다행히 안쪽 밸브를 닫아둬 사고는 없었다. 귀신이 홀릴 때는 영혼도 온통 도둑맞는다.

원유를 하역하는 동안 하역센터의 전광판에 온 신경을 모았다. 신경이 뻣뻣해 쥐가 났다.

 

이때 누가 어깨를 쳤다.

 

“큰길, 담배 친구가 왔는데도 돌아보지도 않아?”

 

어깨의 신경이 경련을 일으켰다.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고교 친구였다. 삼년 전 이민 와서 살고 있는 친구. 대리점과 함께 온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친구는 대길을 ‘큰길’로 부르곤 했다. 순수한 우리말이 좋다고 하면서.

고교 때 키 큰 무리들이 있었다. 교실 뒷좌석을 차지하면서 담배서클을 만들어 화장실을 아지트로 삼았던 멤버들. 송대길은 체질적으로 담배와 궁합이 맞지 않았으나 무리는 담배 한 대 피우는 멋을 가져야 한다고 우겨대던 놈들. 때로는 멋있는 녀석 한 명은 있어야 서클의 권위가 살아난다면서 윽박지르듯 합류시킨 특종들. 그러나 좋은 놈들이었다. 좋은 놈들 중에 친구는 또 좋았다.

 

 

"제수씨는?"

 

친구의 부인은 마오리족이다. 그 흔한 백인도 있고, 한국 교포도 있는데 왜 하필 마오리족이냐고?

 

“어차피 지구는 좁아지는 거여. 피는 섞여지기 마련이라구. 백의민족 그리고 순종 찾아봐야 한 세기 후면 다 섞여지는 거라구. 다른 사람보다 좀 빨리 섞었을 뿐이라네. 미스유니버스가 왜 베네수엘라에서 많이 탄생하는 줄 알어? 혼혈아가 많기 때문이여. 피는 섞이면 예뻐. 하루에도 수만 대의 비행기가 지구를 돌아다니면서 지구의 인종을 믹스시키고 있다구. 앞으로는 외계인과도 피가 섞일 거여.”

 

언젠가 마오리족과 결혼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몇 세기 앞에 사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함께 전우인 미군의 소개로 뉴질랜드 이민을 결행했었다. 이 년 전에 낳은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나. 행복이 뭔지도 안다고 한다.

 

그는 작정을 하고 송대길을 만나러 왔다. 남섬의 퀸스타운에서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오클랜드까지 올 만큼 정성이었다. 자기 처제가 있는데 마음에 들면 우선적으로 예약해두겠다고 말하는 놈이다.

 

육상 정유공장 탱크가 비지 않아 일주일 동안 오클랜드 항에서 정박한 것은 행운. 선주 입장에서가 아니라 선원 입장에서.

친구와 더불어 퀸스타운에 도착하여 자동차를 몰고 남섬의 해안도로를 천 킬로나 달렸다. 마오리족 아내와 두 살짜리 애도 함께 탔다. 피는 섞이면 예쁘다는 게 진리. 아이는 예뻤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감탄사를 재촉했다. 때 묻지 않은 땅에 마음껏 여행하는 것이 미안하다. 혹시 때를 묻힐까 봐.

남섬에는 서쪽 연안 가까이 높은 산맥이 뻗어 있고, 최고봉 쿡산을 비롯해 삼천 미터급의 높은 산이 이어진다. 태즈먼과 폭스 등의 빙하, 와카티푸호 등의 수많은 빙하호를 비롯한 빙하지형이 감정을 몇 바퀴씩 돌려놓는다. 친구가 이 땅에 주저앉은 이유를 알겠다.

 

세계최초의 번지점프대가 있는 카와라우강 다리 위로 건너가 보자.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파란 물을 보노라면 혼이 빠진다.

‘번지 없는 인생아 안녕!’

그래도 한이 없을 것이다.

 

남서안의 대규모 피오르드가 눈앞에 펼쳐진다.

일광욕을 즐기는 바다표범, 빙하에서 녹은 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장관, 러브스토리를 촬영할 만한 은밀한 해변. 마운틴 존 천문대에서 보는 별자리의 아름다움…….

이 모두가 절대로 미워할 수 없는 장관들이다.

 

친구의 아내 이름은 히네모네다. 아름다운 전설을 갖고 있는 이름.

북섬의 로토루아 호수는 마오리 족의 딸 히네모네를 전설로 품었다.

 

뉴질랜드가 탄생하기 전 원주민 마오리족은 부족들 간에 치열한 전쟁을 했다.

호수 안의 섬에 사는 한 부족의 딸 히네모네와 호숫가에 사는 다른 부족의 청년 두타니카는 서로 사랑했다. 두타니카는 밤이 되면 호숫가에 나와 피리를 불었고, 히네모네는 피리소리 나는 곳으로 향하여 카누를 저어갔다.

히네모네 아버지가 이것을 알고 섬의 카누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히네모네는 밤에 피리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표주박 수십 개를 허리에 동여매고 또다시 호수를 헤엄쳐 두타니카에게 갔다.

결국 목숨을 건 딸의 사랑에 아버지는 굴복해 두 젊음의 사랑이 이뤄지고 마을은 화해했다.

뉴질랜드판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이었다.

 

태평양을 건넌 친구의 사랑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사랑은 원수를 극복하고 국경을 뛰어넘고 인종을 초월한다고 교육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