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바다와 인생을 논함

태평양과 인생을 논함

오선닥 2011. 10. 14. 21:40

미국으로 왔으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지.

가득 실은 사료용 및 공업용 곡물을 빨리 일본에 갖다 줘야 한다.

일본 산업체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70년대 중반 일본은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일손도 부족했다.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은 도움이 됐을 게다.

식당 종업원이든 해상 선원이든….

 

 

 

 

 

바다와 인생을 논함

 

 

곰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배불리 먹어둬야 한다.

파나마운하를 뒤로 하고 배는 태평양으로 들어선다. 배의 엉덩이가 뒤뚱뒤뚱하다. 발보아에서 배불리 먹어둔 시커먼 벙커C와 구릿빛 디젤유로 배의 몸무게가 늘어나 버린 것이다. 이십 주야로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서는 이만한 포식은 필수조건이다.

 

 

이젠 벙커를 탱크에, 선식을 대형냉장고에 가득 채워놨으니 일본 도착까지 LA 같은 주막 항에 들를 필요가 없다.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고 누가 말했나. 배도 기름만 먹고 항해할 수 없다. 배를 움직이는 인간들이 있어야 하고, 인간들은 정신을 꼭 붙잡고 깨어 있어야 한다. 안전한 운항을 위해서 말이다.

 

 

가장 큰 적군은 졸음이다. 주간 작업으로 피곤해 야간 당직 중에 조는 수가 있다. 저녁 늦도록 오락을 하다가 잠을 자지 못하고 바로 당직을 서는 경우.

배들이 많이 다니는 연안항해라면 위험천만.

배들이 살짝 키스하고 지나갈 때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엉덩이를 세차게 쥐어박고 지날 때는 간 떨어지는 일이다. 마주보고 박치기하는 날엔 ‘바다에 매골’이 현실화되기도 한다.

 

 

연안을 벗어나 대양으로 접어들었으니 또 다른 적이 나타난다.

지루함이다.

 

 

당직자 두 명이 침묵형이거나 고독형이라면 지루함은 온 지구를 짊어진 것처럼 무겁다.

야간엔 기관실보다 선교가 더 심하다. 불이 훤히 켜져 있고 엔진 소리가 요란한 기관실과는 달리, 선교는 생태적으로 어두워야 하고 조용하도록 돼 있다.

두 당직자가 서로 숨소리라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별이 총총할 때는 고독이 파고들기 쉽다. 주위가 어두울 때 별은 더 총총해 보인다.

차라리 어느 쪽인가 먼저 죽음을 거론하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라고 누군가 말했지.

삶의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웅덩이가 숨어 있다, 라고 철학으로 간을 쳐서 말하기도 했지.

 

 

'Suicide' 이야기는 피해서 가도록 하자.

배에는 자살 시도자를 막아줄 펜스가 마땅찮다. 당연히 119의 5분대기조도 가까이 있지 않다. 오로지 깨어있는 정신밖에 믿을 구석이 없다. 박힌 정신과 나간 정신은 백지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것이라구.

 

 

이럴 때 누군가 먼저 행복을 거론해줘도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길을 보여주기 때문.

 

 

플라톤은 자신이 행복하게 태어난 이유를 이렇게 전개했다.

하인이 아닌 귀족으로,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다른 나라가 아닌 그리스인으로,

여자가 아닌 남자로,

그리고

소크라테스 시대에 태어난 것을 …

행복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한 가지 빠졌구먼.

선원이 아닌 육지인으로.

 

 

송대길은 플라톤의 행복 항목에 동의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단지, 박정희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행복하다고 선포해야 할까.

그렇다. 대통령은 달러 벌어오는 사람을 가장 좋아했고, 또 애국자라로 추겨 세웠다.

 

 

남자로 태어난 것도 행복 프리미엄으로 작용할까.

마도로스 박의 남성다움 때문에 바다로 뛰어든 남자가 부지기수였지.

배우 박노식의 마도로스 파이프가 멋있어 바다로 나간 죄밖에 없는데 바다가 감옥이 될 줄이야.

 

 

 

 

* * *

 

 

누군가 먼저 술을 권해도 좋다.

왜냐하면 삶의 고난을 나누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

 

 

저녁에 술판이 벌어졌다.

장소는 고급 룸사롱도 아니요 서민 포장마차도 아니다. 태평양 한가운데 날짜변경선을 막 넘어서는 순간, 어느 선상에서.

굳이 장소를 말한다면 선원식당.

술판은 이유가 있을 때 분위기가 맞춰진다.

각 부서마다 고된 작업을 한 후에 판이 벌어지고 있다. 갑판부는 카고크레인(cargo crane)의 와이어를 점검하고 교체하며 녹슨 부분을 떼어내고 페인트칠했다. 기관부는 발전기를 오버홀했다. 해체해서 보수한 후 다시 조립했다는 뜻이다.

알코올로 단합을 과시하는 것, 나쁘게 보지 마라.

 

 

대충 술이 한 순배 돌아갈 무렵 갑판장이 조리수 허씨에게 사촌 처제 다루는 법에 대해 한 수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입에 마귀 같은 미소를 지으며, 형부! 나 담배 한 개피만, 하면서 죽여줍디다.”

 

본격적 수업은 이렇게 시작해서.

 

“그 다음은?”

 

모두들 술잔을 잠시 테이블에 고정시키고 귀를 집중시킨다.

실감나는 설명은 이랬다.

 

 

처제가 담배를 달라며 가까이오자 아랫목 녀석이 갑자기 주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원인은 분명 처제가 속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카디건이 살짝 제처지면서 원피스 위로 오똑한 봉오리가 또렷하게 튀어나온 게 확인됐다는 점. 또 힙 라인에 있어야할 팬티 자욱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는 탄성적 스킨. 도톰한 젖은 입술, 할딱이는 젖가슴은 참을성을 파괴한다.

 

 

“혹시라도 처제가 눈치 채면 대망신이다 싶어 얼른 중심을 고정하고 잘 꼬지 않은 다리를 힘주어 꼬았으나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였죠. 눈앞에는 그녀의 순결한 우유통 두 개가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을 뿐이었고, 알토란같은 하얀 젖가슴….”

 

“설명이 너무 길어. 결론이 뭐여?”

 

옆에서 허 씨의 이야기를 넋을 빼고 듣던 조리장이 명령조로 말한다. 상사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서서히 숨을 내쉬면서 최대한의 카리스마를 듬뿍 담아 천천히 입을 열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좀 더 설명을 해야 합니다. 고통과 쾌락은 자극을 준다는 의미에서 같은 거라는 생각을 했죠. 아래 녀석은 고통, 위 머리는 쾌락이라고 할까…”

 

“자네가 뭐 철학자라고 설명이 길어. 뜸 들이는 방법도 여러 가지구먼.”

 

 

주위의 재촉에 못 이겨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어진 내용.

 

 

방에 들어가 이미 잠든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을 훑어보고 확인 차 둘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비행시켜 보았다. 반응이 없자 거실로 다시 돌아와 처제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렇게 순결하고 애교 좔좔한 미인이 자기 옆에서 시계 침이 한 바퀴 돌고 닭 울음을 재촉하는 시간까지 부어라 마셔라 했다.

 

 

“형부, 나 술 고파요. 다른 술 주셔요. 네? 하는데 이게 마치 뭐 달라는 것같이 들렸지 뭡니까. 그래서 속옷 없는 치마 밑으로 손을 뻗는 순간, 그녀는 허걱대기 시작하는데 갑작이 방문 여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다행히 아이가 목이 마르다고 하면서 물 마시러 나오는 거예요. 좀 아쉽지만 여기서 끝입니다. 꼬리가 길면 밟히니까요.”

 

 

“별것 아니구먼.”

 

“아니? 저희 집에 폭발물이 터져 가정이 깨져야 깨소금 하겠습니까?”

 

허 씨가 웃자 그의 대머리는 더욱 번쩍인다.

 

 

"여자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다 머리가 빛나리인가 봐."

 

"아닙니다. 제 머리는 돌대가리여서 머리카락이 올라오지 못해서 그래요."

 

또 웃음.

 

 

 

 

* * *

 

 

선원들은 종종 자신을 비하한다. 땅에 던져지면 양반, 바다에 던져지면 뱃놈이라고 하면서. 헤어진 러닝셔츠를 반으로 찢어서 하나는 부엌으로 던지며 이것은 <행주>라 하고 나머지 하나는 마루로 던지며 이것은 <걸레>라고 하니 팔자소관이란다.

 

 

출항 후 몇날이 지나면서 서서히 빈터가 생기던 마음의 한쪽을 가족들의 편지 글들이 채워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초원다방의 미스 고가 엽서 한 장이라도 보내주면 좋을 것 같다. ‘미스 고’ 노래도 많이 불러지곤 해서. 짤막한 싯귀라도 한 줄 있으면 감동을 먹을 것 같다.

 

 

- 저녁 해가 지고 아침 해가 솟으니 또 새날이 되니라 -

 

 

이렇게 해서 시간은 굴러간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마도로스의 시간에는 이끼가 잔뜩 붙어 시간이 진득진득하게 밀려가는 것 같다. 마음에는 의문이 잔뜩 끼어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던 비전마저 덮었다. 청춘은 한두 조각 꽃잎을 떨구면서 가버릴 건가.

낯선 물을 스치면서 지나가는 삶이 어떤 자국을 남길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는 시간은 아무리 빨리 돌아와도 늦은 거야, 하며 신입 선원은 사춘기를 갓 벗어난 그의 애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놓고 귀국할 날만 기다린다.

뺨이 발그스레한 게 사춘기 지나 오춘기로 접어든 그녀를 오를 대로 오른 물이라고 그는 표현하곤 한다. 여자는 되러 계속 사춘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애송이로 취급하는 그를 바보, 머저리, 해삼, 말미잘 같은 눈치 없는 사내로 제쳐놓았다.

하이힐 바깥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뒤꿈치는 계란만큼 미끈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마누라가 예뻐 처갓집 말뚝에 절할 뻔 했던 한 기관수는 열 달 승선 후 합궁해서 나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잘 자라고 있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며 선내 생활을 참아내고 있다.

국제신사 아빠를 둔 아이는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게 커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비록 배에서 기름 묻은 옷을 입고 일하며 국민소득 400달러의 한국이 그의 조국이긴 하지만.

 

 

한국은 천 년간 철학자와 학자들이 나라를 다스린 사가지(仁義禮智) 있는 나라라는 걸 태어난 아이가 알아줬으면 하는 게 기관수의 희망이다. 해적질하고 총칼로 신대륙을 전령한 아메리카대륙의 개척과는 한참 다르다. 한국만큼 다양하고 친근한 자연을 가진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애국가의 가사는 온통 자연에 대한 애창이잖니. 동해물, 백두산, 남산, 소나무, 하늘, 바람도 있냐고 감탄할 만.

 

 

도무지 갑판장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갑판원이 간혹 골치를 썩인다.

 

“자네 고향이 어디야?”

 

“완도입니다.”

 

“진도와 먼 곳이냐?”

 

“아녀요. 가까운디요.”

 

“진돗개가 서열을 잘 지키는 거 알지?”

 

“보스기질이 강하죠.”

 

“그럼 갑판장 시키는 대로 잘해.”

 

 

진돗개처럼 서열 준수를 잊지 말고 지시에 잘 따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멧돼지와 진돗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진돗개 세 마리가 공동작전을 펴면 멧돼지를 피곤하게 해서 물어 죽인다. 강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한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도 일단 같은 배를 탔으니 도리 없이 협력해야 한다는 상식을 젊은 선원에게 주입시켜주는 것은 갑판장 같은 상사의 몫이다. 인생에서 승리하면 조금 배울 수 있고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운다는 금언을 금덩어리처럼 귀중하게 여기라고 말해 둘 필요도 있다. 사소한 일로 싸우고 비틀어질 때가 있으니까.

 

 

대양항해 중에는 일상적인 과업 외에 또 다른 과업이 있다. 인생을 맴도는 넋두리를 풀어놓는 것.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외국어를 사용할 때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이 유머라고 하지만 결코 웃음의 멋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오오 해머 가져오라’

일본어, 영어, 한국어 3개 국어가 믹스돼 있는 말. 이런 비빔밥 말이 선원들에겐 익숙해진 언어 풍습인지도.

 

 

 

 

* * *

 

 

곡물을 잔뜩 실은 배는 주야로 쉬지 않고 달린다. 나흘 간 만리장성 길이(2700km)만큼 달린다. 오늘 회사로 보낸 정오 리포트에 적힌 선속은 많이 낮았다. 일본 근해 쿠로시오 해류와 편서풍의 앞바람 때문이다. 하루에 삼팔선 철조망(248km)의 왕복거리 쯤이나 항진했나.

 

 

대양에서 육지로 전보를 보낼 수 있는 것은 문명이 준 혜택이다. 열 자 기준으로 매기는 전보료를 아끼기 위해 문장을 다이어트 하느라고 안간 힘을 쓴다.

만약 마르코니가 1915년 무선전신을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사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영국과 캐나다 간에 연락이 쉽게 될 수 있었을까. 배로 도망간 흉악범을 잡을 수도 없었을 테고.

지구상 전리층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마르코니의 무선전신이 또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리고 에디슨이 진공관증폭기를 발명하지 않았더라면….

 

 

12세기 나침반과 중앙타가 설치되지 않았더라면 배를 잘 운전할 수 있었을까. 또 14세기에 화약이 중국에서 유럽으로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신대륙 점령이 가능했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배의 도서실에 책이 있을 수 있을까, 등은 뱃놈에겐 사치스런 가정법.

 

 

뭐,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니고 여덟 개였더라면 십진법이 아니라 팔진법이 사용되었을까. 그럼 아예 손가락이 달려 있지 않았더라면 뭉뚱한 두 팔만 사용해야 하니까 오늘날 디지털 신호처럼 이진법이 쓰였을 건가.

한가하면 할수록 온갖 지푸라기 생각을 다한다.

 

 

“아차! 한 씨, 빌지 사운딩 좀 해봐야 되지 않을까요? 어젯밤 파도가 심해서.”

 

 

잡동사니 생각을 하다보면 제할일을 잊어먹는 게 우리네 선원이다.

선창에 빌지가 차서 곡물이 썩는 날엔 시말서 준비해야 한다.

갑판수 한 씨는 묵묵히 빌지를 측정하러 갑판으로 내려간다. 뒷모습이 늠름하지만 이 양반에게도 걱정은 있다.

 

 

한 씨는 배 생활을 시작하기 전 직업을 찾지 못해 숱한 고생을 했다. 어떤 때는 동전 몇날을 쥐고 물통에서 기어 나온 도다리처럼 거리를 비틀거리기도 했다.

그러한 방황 끝에 시작한 해상생활이 요즘은 이상한 꿈으로 잠을 설치곤 한다. 신혼 첫날밤 아내의 혼전 경험 고백에 세상 어느 남자도 양보하지 못할 관용을 베풀었다고 자부했는데 요즘 그 자부심이 흔들린다. 오매불망 꿈에도 잊지 못하는 아내가 어떤 사내에게 젖 빨리는 장면이 지난밤 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길한 장면은 오직 꿈에 불과하고 아직 현실이 아니지 않나로 위안이 된다.

 

 

여태 고추 꼭지를 따지 않은 송대길이 한 씨에게 줄 만한 위로의 말은 없다. 어느 책에서 읽은 것,

 

 

-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고, 여자는 남자를 지배한다. 이는 여자가 베갯머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 -

 

 

그러나 남자 선원들은 베갯머리 아닌 뱃머리를 지킬 뿐이다.

오늘 또한, 세월의 녹슨 호흡을 하며 원시의 비릿한 바다 아침을 맞는다.

일본 입항을 앞둔 일항사 송대길과 갑판수 한 씨가 이야기를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