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바나나 쟁탈전

바나나 쟁탈전(제5회)

오선닥 2013. 10. 9. 15:01

1991년 바나나 수입자유화 후

 

가격폭락을 견디다 못해

수입업자의 자살 사건

 

손해의 만회를 위해

무리하게 추가 수입을 추진하는

수입업자

 

외상운임 회수를 위해

연장 운송에 휘말리는 해운사

 

모두가 공범자다

 

 

 

 

바나나 쟁탈전

제5회

 

 

10. 그냥 드릴께

 

경락가격이 통관비용에도 미치지 못하자 화주는 인수를 포기하고 뱃삯 대신 바나나를 선박회사에 넘겼다. 그러곤 남는 바나나를 러시아 등 제3국으로 수출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국내 소비 부진으로 가격은 지난 4월에 비해 7월 들어서는 3분의 1 가격으로 폭락했다.

 

“오 상무님, 이걸 어떡하면 좋아요. 니콜라코프호에 3천톤이나 실렸는데 이걸 모두 폐기해야 될 판에요.”

 

대붕의 김대두 사장이 사색이 되어 한국해운의 오선덕 상무실로 밀고 들어왔다. 니콜라코프호는 한국해운이 러시아로부터 용선한 선박이다.

 

“7월 현재까지 금년 수입 예정량 20만 톤을 이미 초과했으니 가격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만…….”

 

오선덕은 김 사장을 소파로 공손히 모시고 비서를 시켜 커피를 가져오도록 했다. 카페인이 김 사장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면 좋을 텐데.

 

지난 5월까지만 해도 인수를 포기한 바나나는 봉암통상이 베트남에서 수입한 700톤뿐이었다. 그러나 6월에는 만나와 대산, 창암 등이 인수를 포기해 모두 4,200톤이 러시아로 재수출됐다.

 

“러시아 놈들만 좋은 일시키네요.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날름 주워 먹는 놈들…….”

 

종로에서 뼘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김 사장은 제 정신이 아니다. 카페인 성분이 안정에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는지 김 사장은 더 흥분한 상태다. 이를 좀 가라앉혀야 한다.

 

“억울하더라도 어쩝니까. 김 사장님도 제3국 수출을 고려해보시는 것은?”

 

대붕은 러시아 측 무역업자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한국에 바나나 홍수사태를 잘 알고 있는 러시아는 이참에 공짜로 먹겠다는 배짱들이다. 가격은 중국이 좀 나으나 운송비의 문제가 있다. 러시아는 북태평양 어획물을 실으려 가는 냉동선의 항로상에 있으므로 운송비가 중국보다 싸다.

 

‘구워먹든 삶아먹든 배에서 알아서 하시오. 그냥 드릴 테니!!’

 

일부 수입상은 나자빠졌다. 이런 와중에도 보세창고 바나나를 몰래 빼내 시중에 팔아넘기다가 들통난 수입상이 관세법 위반혐의로 오랏줄에 묶여가는 모습이 TV에 나오기도 했다. 만화에서는 바나나를 여성의 노리개로 사용하는 것이 나왔다. 수입 과정에 농약이 뿌려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냥 사용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 텐데.

 

이윽고 바나나관련 사건이 터졌다. 강남의 대치동에 있는 바나나숙성 냉장고에서 한 남자 시체가 발견됐다. 40피트 컨테이너 크기의 냉장고의 바닥에 40대 중반의 남성이 쓰러져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발견된 유서는, ‘달러이자로 빌린 돈을 도저히 갚을 수 없으니 용서하세요.’눈물 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내가 이 눔을 죽였어!”

 

아세틸렌가스에 질식 사망한 사람은 대붕의 김대두 사장의 친구다. 김 사장은 대성통곡을 했다.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사업실패가 상승작용을 해 통곡의 소리는 더 커졌다. 바나나 사업을 하면 대박을 친다고 김 사장이 극구 추천해서 바나나에 뛰어들었던 친구이다. 정직하게 푸줏간 운영을 잘하고 있는 사람을 꼬드겨서 말이다.

 

김대두 사장은 미망인 앞에서 한바탕 울음을 터뜨렸다.

 

“하필 가스에 질식하다니! 차라리 이자에 질식해 죽더라도…….”

 

온갖 말이 쏟아졌다. 쏟아내는 말을 미망인이 울음으로 받아냈다.

 

냉장고에 넣어둔 칼슘카바이드(CaC2)는 물과 접촉하면 아세틸렌이 발생한다. 이 가스에 그의 친구는 죽었다.

 

아세틸렌이 에틸렌처럼 후숙작용을 한다. 문제는 공업용 카바이드는 불순물이 섞여 있어서 인체에 유독하다. 바나나는 에틸렌 가스로 후숙(수확 후 숙성)시키는 것이 원칙이나 보관비용 및 시간절약을 위해 밀폐공간에 카바이드를 넣어 후숙시키곤 한다. 익는 속도가 빠른 만큼 썩는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먹어야 한다.

 

울음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 김 사장은 이게 남의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자신의 처지는 어떤가? 초기에 벌었던 돈은 풍선 바람 빠져나가듯 다 없어지지 않았는가.

 

 

 

11. 줄도산

 

가격 폭락으로 운임조차 건지지 못한 화주는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부자가 되는 꿈은 남가일몽이요, 세웠던 집은 사상누각이다.

 

결국 배에 실린 바나나 화물은 천덕꾸러기로 변하고 말았다. 바나나 사업자는 시장 바닥에 나자빠져 갔다.

 

정다남 사장은 용케도 본전치기에서 멈췄다. 동물적인 감각으로 시장을 읽은 것이다. 오선덕은 그녀의 판단력이 하루아침에 터득한 것이 아님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녀는 오 상무가 바나나 수입을 더 이상 권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해운사는 운임만 벌면 되는데도 그렇게 권하지 않았다. 우주에 은하수가 있듯 둘 사이에 사랑 같은 뭔가 부유하고 있음을 믿고 싶었다.

 

그녀는 사업에서 고정관념은 좋지 않다고 말했다. 필리핀 바나나, 캘리포니아 오렌지, 칠레 포도, 뉴질랜드 키위……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정신을 석고로 발라 딱딱하게 하는 거와 마찬가지라고 말하곤 했다.

 

“전, 오 상무님을 사랑합니다. 근데 오해하지 마십시오. 평생 오선덕 한 사람만 사랑하란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 커피 한잔 나눈 자리에서 여자가 난데없이 고백 비슷한 걸 했을 때 오선덕은 놀랐고, 한편 안도했었다. 사랑조차 바구니의 계란 이론을 적용시키는 여자가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정말 조금밖에 알 수 없는 여자였다. 알면 알수록 그녀는 신비에 쌓인 여성 같았다.

 

배순욱 사장은 5억을 손해 본 상태에서 멈췄다. 그 정도 손해는 지난 삼십여 년 사업하는 동안 그가 여러 번 겪어본 일이다. ‘어깨에서 팔고 허리에서 산다’는 주식매매의 원칙이 그의 머릿속에 생물처럼 살아 있었다.

 

김대두 사장은 오선덕 상무가 외상 운임에 협조하지 않자, 오 상무의 상사인 조종채 전무를 찾아갔다.

 

“여기서 멈추면 전 거지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살려주십시오.”

 

선박을 달라고 애걸했다. 조 전무는 매정함을 보일 수 없었다. 전무는 오선덕을 불렀다.

 

“오 상무, 김대두 사장 좀 도와줍시다. 우리한테 제일 먼저 바나나 화물을 준 사람 아닌가.”

 

“형님, 시황이 악화되고 있는데 계속 운송하면 그 사람 확인 사살하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이쯤에서 끝내면 김 사장은 자기 집은 건질 수 있습니다.”

 

직장의 상사가 아니라, 학교 선배로, 사회의 연장자로 호칭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돌리고 싶은 것이 오선덕의 진심이었다.

“며칠 동안 사정하는데, 그래도…….”

 

“임원회의에서 한번 의논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상사의 결심이 굳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재고할 기회를 위해 오선덕이 내놓은 제안이었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조 전무는 오선덕의 손을 잡고 목소리를 낮췄다.

 

“사장님과 부사장님은 나한테 다 일임했다네.”

 

손에 따뜻함을 느낀 오선덕은 오히려 불안했다,

 

“그래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잘못되면 전무님과 저는 절벽입니다.”

 

“알고 있네만. 시황이 이보다 더 악화되겠어?”

 

“그럼 운임이라도 선불을 받아둬야 합니다.”

 

“……”

 

“수입업자들이 줄줄이 도산하고 또 지금도 외상 운임이 이백만 불 깔려 있습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침묵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 조 전무는 사무실의 창문을 열고 우두커니 바깥바람을 맞았다.

 

“그래서 난 결심했네. 남은 운임을 회수하려면 한번은 더 거래해야 되지 않겠나.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지겠네. 선박 스케줄을 알아보게.”

 

아~앗.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 기차가 멈출 리 없다.

 

삼천오백 톤의 바나나를 싣기 위해 용선한 선박 울레니엄호가 부산을 출항해 필리핀으로 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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