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바나나 쟁탈전

바나나 쟁탈전(제3회)

오선닥 2013. 9. 25. 19:45

1991년 바나나 수입개방 후

 과잉수입으로

  시장가격이 폭락하고

 출혈판매가 시작된다

 

 

 

 

바나나 쟁탈전

제3회

 

 

6. 가격폭락 전조

 

이제 한 다발씩 바나나를 집어들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예전처럼 맛있지는 않다. 베이지색의 미끈한 과육은 소풍이나 생일파티의 자리에서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서 표본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나나 가격의 폭락 전조가 모락모락 피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값이 뚝 떨어졌다. 수입량이나 운송방법 혹은 관세변동이 있었던 것일까.

 

눈치 빠른 수입상은 원가로 재고를 처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미 부산항에 정박지를 찾지 못해 마산항 부근에 앵커를 박은 운반선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배순욱 사장과 정다남 사장은 오선덕 상무에게 바나나 운반선의 입항 추이를 자주 물어왔다.

 

“오 상무님, 제 육감은…… 바, 바나나 냄새가 좋지 않아요. 저의 감지력은 부친한테서 물려받은 건데, 아무래도 수입을 중단해야 될 것 같아서요.”

 

정다남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오선덕의 반응을 살폈다. 시황을 보는 안목일까, 풍만한 젖가슴만큼이나 넉넉한 육감의 능력 때문일까. 그녀는 뭔가 느껴진다는 눈치였다.

 

오선덕은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했다.

 

“해운사는 수익을 떠나서 고객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데, 가격 추이를 살피는 게 현명할 것 같습니다.”

 

오선덕은 역지사지의 진심을 보였다. 오랜 해운영업 경력에서 익힌 고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적어도 여성 사장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김대두 사장은 선석(船席)을 잡기 위해 부산지사를 닦달하기에 바쁘다. 대붕의 바나나를 실은 배가 입항한 지 사흘이 지났으나 선석 확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산항 부두 빨리 잡아두라!”

 

그의 닦달은 배지도 않은 아이를 낳으라는 수준이다. 직원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지경이다.

 

“그, 그런데 현재 육상창고 임차가 불가합니다. 사장님!”

 

“육상창고가 꽉 찼다고? 마산 쪽은?”

 

“예, 영남지역의 냉장창고 모두 동이 났습니다.”

 

“제기랄~!”

 

대붕의 부산 직원은 서울 사장의 전화통 고함에 정신을 못 차린다. 대한민국 해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바나나를 더 이상 보관해둘 창고가 없단 말인가. 김대두 사장은 애가 탄다.

 

운반선은 항구에서 바나나를 실은 채 무작정 대기한다. 4월의 날씨가 바나나 보관온도 12.5도를 유지하기에 이상적이라 하더라도 체선(滯船)이 길어지면 화주(貨主)는 하루에 체선료 천만원 가량을 선주에게 물어야 한다.

 

하역이 늦어지자 선주도 마음이 편치 않다. 앵커를 내리고 체선료를 받기보다는 운항해서 운임수입을 내는 게 낫기 때문이다.

 

동대문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한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김대두 사장에게 한마디 던졌다.

 

“요즘 바나나 장사 어때요?”

 

“잘 돌아갑니다.”

 

별 의미 없이 대답하는 김 사장의 마음은 착잡하다.

 

그런데 옆에 서 있던 다른 가게의 남자 사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갈릴레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구만 잘 돌 뿐이지. 무슨 장사가 잘 돌아. 시장에 깔린 게 바나난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는 한량은 인생을 전전하다가 동대문에서 의류점포 하나를 낸 사람이다. 김대두 사장과 나이가 비슷한 40대 중반으로 농담하면서 지내는 사이다.

 

그래도 아주머니는 가격이 더 궁금했다. 가격이 괜찮으면 자신도 바나나를 취급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기 때문이다.

 

“단가는 어떤지요?”

 

“날마다 다르네요.”

 

이 순간 철학 사장이 또 끼어들어,

 

“비발디는 계절마다 다르다고 하던데…….”

 

비아냥거렸다.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김 사장은 그냥 웃음으로 넘겨버렸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그는 심각해지려 했다.

 

‘근데, 정말 시장 분위기가 안 좋은가?’

 

어쩌면 철학 사장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가격이 반 토막 돼 가는 게 불안한데 김 사장은 괜히 자신감마저 흔들렸다.

 

인간의 욕심이 바나나 껍질을 벗길 때마다 드러나기 시작하고.

   

 

 

7. 출혈 판매

  

수입자유화 반 년 만에 수입물량은 무섭게도 지난해의 12배에 달했다. 무분별한 과잉 수입으로 바나나의 시판가격이 폭락으로 이어졌다. 일부 바나나는 저온창고를 얻지 못해 그대로 썩어 폐기되기도.

 

신문에는 바나나를 수입하는 대기업 홍보부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바나나를 수입해 바나나 농가가 다 망하게 되었는데 수입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는 작심하고 질문하는 것 같았다.

홍보부장의 반박도 그만큼 강력했다.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그 동안 너무 비싸 사먹을 엄두를 못 낸 많은 국민들이 싸게 바나나를 사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수입자유화를 왜 나쁘게만 생각하십니까?”

 

“왜 한성 같은 대기업이 식품류인 바나나를 수입합니까? 중소기업의 영역 아닙니까?”

 

“종합상사는 바늘에서 선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을 수출도 하고 수입도 하는 회삽니다. 생산과 영업, 서비스 활동 등을 통해 정당하게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기업의 역할 아니겠어요. 바나나 수입이 중소기업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럼 계속 수입하겠다는 뜻이겠네요?”

 

두 사람 모두 얼굴이 벌개져서 도무지 언성을 낮추려 하질 않았다.

 

한국의 해운회사는 극과 극을 달렸다. 사내 경영 갈등으로 선주협회장을 지낸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이 투신자살을 한 사건은 해운합리화의 진통이 얼마나 심각했나를 말해주는 얼룩진 흔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오선덕이 몸담고 있는 한국해운은 자금 부족으로 고사할 뻔 했는데 해운합리화에서 살아남아 15척의 특수 전용선을 운항하게 되었다. 경영주가 모든 개인 재산을 팔아 회사 자구노력에 진력하고 자신은 작은 전셋집으로 옮긴 진정성이 인정됐다는 미담이 있다.

 

벌써 다섯 척의 운반선이 바나나 수송에 투입됐다. 자사선 두 척과 용선 세 척. 바나나 운반선을 증선(增船)한 조종채 전무의 결단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공급과잉에 출혈 판매경쟁이 치열해져갔다. 구상무역(Barter Trade) 형태로 수입되던 바나나가 수입 자유화되면서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여 10월말 경 수입 물량이 30만 톤에 이르렀다. 물량이 늘어나면서 에콰도르산이 크게 증가하여 전체 수입물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에 이르렀다.

 

수입단가는 상반기까지 톤당 800달러선을 유지하던 것이 10월경엔 430달러까지 폭락하면서 업체 간에 원가에 판매하는 출혈경쟁 사태마저 보였다. 이것은 도매시장 가격이 톤당 900달러 수준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세금과 보관, 운송비 등을 합한 원가가 900달러에 육박하고 있어 사실상 수입상의 이윤은 없는 실정이다. 수입상의 재정은 절벽만 깊어갈 뿐이다.

 

 

<다음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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