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바나나에는 비밀이 너무 많다
이걸 알면 다친다
다국적기업 형님 하는 대로 놔두라
음모와 협박도 많다
그러나 조금만 건드리자
바나나 쟁탈전
제4회
8. 바나나 나빠
바나나에는 비밀이 너무 많다. 이걸 알면 다친다. 다국적기업 형님들이 하는 대로 놔두라 했는데 건드리다가 음모와 협박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건드리자.
바나나야 말로 가장 미국적인 과일이다. 치키타와 돌은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다국적기업을 통한 재배에서부터 수송 마케팅 등 바나나에 대한 모든 선례와 규범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미국을 보면 바나나가 보이고, 바나나를 보면 미국이 보인다.
20세기 초 바나나 광고는 ‘천연 항균 포장’을 강조하다가, 영양에 관심이 많았던 1920년대는 ‘비타민 A와 C의 훌륭한 공급원’이라는 점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1970년대가 되자 돌(Dole)사는 ‘바나나는 당신의 허리살로 가지 않는 유일한 간식’ 이라는 광고문을 내놓았다.
‘바나나 공화국’으로 일컬어지는 카리브 일대의 파나마, 도미니카, 니카라과, 에콰도르 등지에서 경제와 정치, 군사에 영향을 끼친 위인은 사실상 바나나 재배 기업이었다.
미국은 1898년 쿠바를 도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카리브 지역의 지배권을 획득해 이미 바나나 시장을 좌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로 무랑루즈 클럽에선 마술쇼가 한창이다. 마술사가 던지는 것은 사과인데 상대 여성은 바나나를 받았다. 속임수가 감탄스럽지만 바나나 껍질을 벗기고 한입에 베먹는 여성의 모습이 고혹적이다.
무대 바로 앞쪽에는 디스코장이 마련돼 있고, 나머지 넓은 홀에는 손님테이블들로 꽉 차 있다. 기둥이 가려져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한 쪽에 두 중년 남녀가 위스키 병을 앞에 두고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40대 중반의 남성과 30대 중반의 여성. 그들은 오선덕 상무와 정다남 사장이다. 여성이 질문을 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는 사과가 아니라 바나나가 아니었을까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마술쇼에도 디스코춤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 그들은 대화에만 열중했다.
여성은 테이블 위 과일바구니에서 바나나 하나를 떼어내 반을 잘라 남성에게 주고 나머지를 자기가 먹으면서 궁금증을 드러냈다.
“‘악’과 ‘사과’의 라틴어 ‘Malum’철자가 같긴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연구결과는 바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던데요.”
“라틴어를 잘하십니까?”
“제 전공은 불어지만 라틴어 교수님의 선악과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정다남 사장으로부터 전공 이야기는 처음이다.
오선덕은 바나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바나나가 악의 근원?”
“바나나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 참 많다는 게 책에 나와 있어요.”
그녀는 바나나를 취급하고부터 바나나 관련 책을 여러 권 읽었다고 한다.
바나나 때문에 지금까지 숱하게 전쟁이 일어났다.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격변의 역사 뒤편에 바나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땅과 노동력 착취는 대표적이다. 1929년 화장실 복지를 외치다 콜롬비아 바나나 농장의 노동자 3천 명이 죽은 사건을 배경으로 가브리엘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책으로 노벨문학상을 따먹었다.
1950년대 과테말라 민주 정부가 바나나 통제권을 놓고 미국의 거대 회사들과 대립하다 전복됐다는 음모론이 있고, 1980년대 마야족 집단학살도 바나나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1993년 EU가 아프리카와 태평양 식민지 지역의 바나나에 대한 호혜관세를 적용하고 남미산 바나나에 대해선 차별관세를 부과하다가 남미와 미국으로부터 무역분쟁을 당했다. 이 ‘바나나 전쟁’은 16년 만인 2009년 종식됐다..
“바나나 정말 나쁜 과일이군요.”
오선덕은 그녀의 바나나 상식에 공감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녀는 설명을 계속했다.
“바나나 자체는 착한 과일인데 사람들이 바나나 역사를 칼질해 놓은 거죠.”
“과일 하나가 세계 역사를 바꿨다니 놀랍습니다.”
바나나를 운송하면서도 바나나에 대해 공부한 것이 별로 없었던 오선덕은 정다남 사장의 바나나 상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 말하고 싶어 한다.
“바나나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이 있지요. 씨 없는 내시 신세가 됐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인가요?”
오선덕은 궁금했던 것이다.
“책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9. 씨 없는 과일
정 사장은 오선덕의 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바나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바나나는 처음 열매가 아닌 뿌리를 캐 먹기 위해 재배했다나요. 그러다 씨 없는 돌연변이 품종이 나타난 거랍니다.”
“그럼 바나나 번식은 어떻게 합니까?”
“바나나는 뿌리를 잘라 옮겨심기만 해도 열매가 열린다나요. 그래서 유전적으로 동일한 씨 없는 바나나만 나오는 거래요.”
이런 방식으로 씨 없는 바나나를 기르면서 사람들은 쉽게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됐다.
바나나는 기원전 5천년 말레이 반도에서 재배되기 시작해 세계 각지로 전파되면서 현재 백 종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먹는 바나나는 단 한 가지다. 60년 전에 생긴 캐번디시(Cavendish)라는 품종. 나머지는 야생 바나나들로 열매 속에 크고 딱딱한 씨를 품고 있어 먹기가 곤란하다.
문제는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져 그만큼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졌다. 병충해가 휩쓸 경우 바나나가 전멸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품종개량이 쉬운 것도 아니다.
“품종개량도 어렵겠지만 저한텐 판매가 어려운 것 같네요.”
그녀는 위스키를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번에 싣고 오는 걸 마지막으로 저는 바나나 장사 끝낼까 해요. 여자가 할 사업이 아닌 것 같아서요.”
오선덕은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졌다. 바나나 운송을 해준 자신이 죄인 같았다.
“솔직히 요즘 가격변동을 보면 저도 수입을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중국과 중동의 수요 증가로 필리핀 바나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고, 남미 바나나도 비싸 국내 가격은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니 말입니다.”
“오 상무님께서 그렇게 조언해주시니 마음이 편하네요.”
양쪽 잔에 술을 따른 그녀는 새삼스럽게 건배를 하자고 했다.
“이건~ 바나나 해방주!”
여자의 얼굴과 목 주위로 위스키 색깔이 감돌기 시작했다. 위 단추가 풀린 옷 틈새로 젖무덤이 슬그머니 보이자 오선덕의 시선이 멈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오 상무님, 제가 여자로 보이는 곳을 찾으셨어요?”
‘아, 들켰나?’ 오선덕은 움찔했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열대과일에도 바나나 외 망고, 용과, 리치, 구아바, 아보카도, 아떼모야…… 많이 있어요. 저 이래봬도 열대과일만큼이나 여성적인 데가 많아요.”
정다남은 정말 과일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흔적이 드러났다. 가슴에 흰 살만 드러난 것이 아니라 과일 지식의 풍성함이 드러났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오선덕은 마음속으로 동의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녀는 열대과일뿐만 아니라 어떤 사업에 대해서도 철저히 파고드는 끈질김이 있다. 이 대단한 여자는 이제 주량을 좀 오버한 것 같다.
“제 술 안 취했어요. 아직.”
오늘 저녁은 여기까지로구나.
나머지 일은 여자를 한남동 그녀의 집까지 바래다주는 일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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