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
호텔현대가
좋은 분위기를 제공하네요
▲블라디보스토크 항
제 8회
호텔현대
일행은 우수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차 안에서 연해주 대표 김연동으로부터 유랑인의 삶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듣고 정은숙이 울컥했다.
“연해주 일대는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독립운동의 흔적으로 가득하네요.”
“그렇습니다. 한인회에서 연해주 전체를 애국 관광지로 발전시키려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자부심에 찬 김연동의 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자 김경진 연해주한인회장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려인협회와 한인회가 구분되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면서, 전자는 소련시대부터 살았던 사람, 후자는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거주 한인을 통틀어 칭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고 그는 설명했다. 북한이냐 남한이냐에 관계없다.
최근 들어 한국 의료봉사단의 극동 러시아 방문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선진 의료 기술이 널리 홍보되어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러시아 환자가 전년 대비 60퍼센트나 증가했다며 놀라움을 숨기지 않는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점과 선진 의료 서비스의 우수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카자흐스탄과 몽골, 중국 한인회를 방문하는 등 한국의료인의 적극적인 방문마케팅 활동이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저녁에는 호텔현대에서 회식을 겸한 식사를 했다. 사공박이 스폰서로 나섰다. 커피 사는 일 외에 별로 할 일이 있겠냐는 평소 그의 겸손함이 오늘은 제대로 역할을 한다고 일행이 추켜세웠다.
식사 후 여행의 피로 때문에 대부분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호텔 최상층 라운지의 위스키 맛이 좋다는 사공박의 제안에 정은숙이 따라 올라갔다. 밴드가 있는 무대 앞에 춤추는 공간이 있다.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둘은 코너 쪽의 자리를 잡았다.
한국인 호텔 매니저가 와서 사공박에게 인사하며 전과 같은 술을 가져오겠다는 말에 정은숙은 사공 사장이 이곳의 단골임을 알고 그의 마당발에 움찔했다. 무역한답시고 외국 곳곳에 간이 둥지를 마련해놓는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색하려는데 지배인이 직접 술병을 가져 왔다.
“18년산 맥캘란 위스킵니다.”
동석한 여자가 들으라는 듯 지배인의 음성 데시벨이 높았다.
정은숙의 시선이 라벨에 붙어 있는 18 숫자를 확인하고 사공박을 향했다.
“사공 사장님은 여기 자주 오시는가 봐요?”
“목재 비즈니스하면서 자주 온답니다. 가평 전원단지 통나무집의 나무도 제가 공급했었지요. 위스키는 참나무통에 숙성한 것이 향기가 좋습니다.”
“나무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위스키는 발렌타인만 좋은 줄 알았는데 맥캘란도 있군요.”
“글렌피딕도 있고 잭다니엘도 있지만 저는 맥캘란을 좋아합니다. 거꾸로 선 삼각형 로고 안의 연수에 매력을 느끼지요. 삼각형엔 묘한 느낌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연애에도 자주 삼각관계가 나타나잖아요. ……가격에 신경 쓰지 마시고 마음 놓고 드십시오.”
“사장님의 비즈니스 자금 오늘 다 쓰시는 거 아녀요?”
“평화연대 회원님께 이 정도 역할은 해야죠. 정 선생님이 술친구 돼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만 돈을 쓰시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는 여성을 명확하게 안심시켜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일단 현지 법인이 결재할 겁니다. 러시아에서 돈 벌어서 한국인에게 쓰는 것 아깝지 않아요. 통나무 사주고 연어 먹어주는 한국인에게 이런 식으로도 보답해야죠.”
한국으로 수입하는 것은 거의 모두 사공박의 비즈니스 아이템에 속한다. 돈 되는 수입품이라면 그의 관심은 자석처럼 따라다닌다.
“한국에 가서 통나무 전원주택 한 채 마련해야 되겠네요.”
“그렇게 해주시면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리고 연어도 많이 먹어야 하겠고요. 참 수산물 무역도 하시나요?”
“차라리 제가 관여하지 않는 것을 물으십시오. 그게 대답이 쉬울 것 같습니다.”
“알 수 없는 팔방미인. 갈수록 사장님을 이해하는 데 미궁에 빠집니다.”
“술 좀 더 드시면 미궁에서 빠져나오실 수 있습니다.”
농담에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여자는 재밌는 사람과 술을 마시고 있다는 걸 서서히 느끼기 시작한다.
사공박이 빈 잔을 채우자 두 사람은 동시에 잔을 올려 들었다. 조금 취기가 오르자 여자는 느닷없이 미안하다고 한다. 윤동주 나이보다 15년 더 살았는데도 남겨놓은 것이 없다면서. 수필집 세 권을 내고, 사춘기 아들이 둘 있는데 뭐가 부러우냐고 사공박이 추켜세워도 그녀는 손을 젓는다. 글만 쓰고 가족을 소홀히 한다며 이혼해 달라는 남편의 요구를 순순히 응해준 걸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 있겠냐. 그녀의 독백이다. 이럴 때 그녀의 가는 목이 머리를 위태롭게 지탱하는 것 같다.
“취하면 어떡하죠?”
이미 취했는데.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시구가 많아지고 고개가 자주 떨어지곤 한다. 손의 동작이 커서 잔이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려는 순간에 가까스로 멈췄다. 사공박이 잔을 잡았기 때문이다.
“침대까지는 데려다 드립니다. 그러나 잠은 재워드릴 수 없습니다.”
“농 넘치는 유머에 술이 더 당기네요.”
이번에는 그녀의 손이 술병을 잡으려는데 사공박이 저지했다.
“이젠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 스케줄도 있고요.”
“저의 낭만을 가로막지 마세요.”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호텔 엘리베이터를 탔고, 조심스런 발걸음 끝에 룸 현관에 들어섰으며, 씨름하다시피 겉옷만 벗기고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쓰러진 여자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일어나는데 걸쭉한 남자 한 사람이 사공박 앞에 나타났다. 거울에 비친 사공박 자신이었다.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잖아.
어색한 장소에서 어색한 도우미가 제발 저렸다고 해야 하나. 여기까지 익숙하지 못한 광경을 본 사람은 일행 중에 아무도 없다는 게 다행이다.
현관문을 닫고 나와서 호텔 밖으로 나왔다. 별이 총총한 여름밤 하늘이 다른 나라 같지 않다. 술을 마시는 대신 밤공기를 즐겼어야 하는데…… 후회했다. 또 후회했다. 여자를 일으켜 사워실로 보내지 않고 옷 입은 채로 잠들게 한 것은 아무래도 도리가 아닌데…… 그것도 후회했다.
객지에 와서 별 것 다 걱정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창문 너머 하늘을 보았다.
“오늘밤 따라 별이 왜 저리 총총하지?”
별을 헤다가 사공박은 잠이 들었다.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현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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