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와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 무대
어떻게 조명해야 하나
▲간도의 위치
제 7회
유랑인과 독립운동
간도는 만주의 일부이다.
간도는 두만강 북쪽과 압록강 북쪽 일대의 동북 3성, 즉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성으로 동북공정정책에 의해 중국의 역사 속으로 빨려들고 있다. 그나마 지리학자들만이 간도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위치한 간도는 양국 간의 직접 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지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곳으로 여진족이 살고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청국인과 조선인 어느 쪽도 입주를 불허하여 섬 같은 공간이라 하여 간도로 불렀다.
“이제 간도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질문으로 확인하며 역사학자 육해수는 신나게 설명해 나간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간도협약’(1909)을 체결하여 영토는 청나라에 귀속되고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은 일본에 넘겨졌다. 일본은 협약 이전만 해도 간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했었다. 현재의 엔변조선족자치주는 동간도(북간도)만을 말한다.
연해주 고려인 마을에는 다양한 재이주민이 살고 있다.
고려인 3세 정빅토르(20)는 우즈베크에 14명의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연해주로 이사 왔다. 할아버지는 연해주에 살다가 1937년 우즈베크로 강제이주 당했던 것이다. 빅토르는 태권도의 꿈을 지니고 애인과 친구를 둔 채 우즈베크를 떠났다. 러시아어로 살아왔던 그가 우즈베크어를 배우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신 7개월의 몸인 김옥산나(36)는 부모님을 우즈베키스탄에 묻어두고 연해주로 왔다. 고려인 3세 정사샤(43)와 고려인 4세 정올가(16) 부녀는 연해주로 와서 극동평화연대의 지원으로 건물을 지어 산다. 오이와 배추, 김치장사로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다. 고려인 3세 유세르게이(40)는 6천킬로미터 이주 길을 기차로 9일 걸려 연해주로 왔다.
그들이 우즈베크에 있었을 때 갈대밭에 물길을 내고 황무지를 갈아 만든 옥토 농장이 ‘황만금농장’이다. 130제곱킬로미터로 농민이 3천명에 이르렀다. ‘황만금농장’과 ‘김병화농장’ 등은 고려인 집단농장으로 노동 영웅을 배출한 유명한 농장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남쪽에 위치한 ‘김병화농장’은 원래 이름이 ‘북극성농장’으로 1925년 창설되었으나 1974년 김병화농장으로 개칭되었다. 김병화가 1940년부터 농장 대표를 역임하면서 고려인 중 유일하게 두 차례나 노동영웅 훈장을 받으며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받는 우수한 집단농장이었다.
그 후 개인 영농화 과정에서 토지분배를 받지 못한 다수의 고려인이 떠난 ‘시온고 아리랑’ 마을에는 인구 3천명이 현재 1천여명으로 줄었다. 타슈켄트에는 고려인문화협회가 있다. 이들은 연해주 독립군의 후예들이기도 하다. 허알렉스는 190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한 허위 창의군 의병장의 아들이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일대에 무국적자가 줄잡아 1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에게 국적 회복의 기회가 주어질지는 미지수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는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당했던 고려인 동포가 50여만명 살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 가장 많은 18만, 카자흐스탄에 10만, 사할린에 4만, 연해주 4만, 모스크바 4만, 러시아 남부지역 5만, 우크라이나 3만, 타지키스탄 등에 2만명이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고려인마을은 제일 먼저 학교를 세웠다. 유대인 다음으로 교육열이 높은 한국인은 학교 세우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많다. 이범진은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러시아 공사로 활약했으며 을사늑약 이후 공관이 폐쇄된 뒤에도 러시아 당국과 외교교섭을 벌이는 등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이범윤은 1904년 러일전쟁 시 간도지방의 의병 500여명과 함께 러시아군에 가담,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1905년엔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의병 육성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채호는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글체 일간 신문이던 해조신문을 통해 교포들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언론 투쟁을 벌였다.
장지연은 1908년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해조신문 주필로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는 등의 활동을 나섰다.
장도빈은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10년 연해주로 망명, 권업신문에 기고하는 등 국권 회복에 주력했다.
이동휘는 1915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 1918년 신한촌 하바롭스크 거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1921년 고려 공산당을 창당,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연해주 고려인문인협회가 일행을 우수리스크 도심의 한 카페로 안내했다.
카페의 분위기가 뭔가 다르다고 느낀 것은 벽에 붙어 있는 한글로 써진 시 한 수 때문이었다. 주인과 종업원이 러시아인인 카페에서 한글시가 왜 붙어 있나.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윤동주의 시 ‘고향집’이었다.
중국 북간도 넓은 벌판에서 시인의 꿈을 키운 젊은이.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지금 전 세계로 번역되어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윤동주는 백두산에서 멀지 않은 중국 룽징(龍井)시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시 쓰는 데 열중했다. 한자어가 없는 한글로 된 구어체의 시는 당시 파격적이었는데 그의 우리말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시를 보니 괜히 고향 생각이 나네요.”
시민단체 대표 박경석이 감동 섞인 말을 하며,
“그래도 세 부의 필사본 중 하나가 남은 것은 천운입니다.”
부가 설명에 모두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민대표가 그런 것까지 다 알고 있냐는 눈빛이다.
시인 본인과 스승이 가진 사본은 없어지고 후배 정병욱의 것만 남았다. 이것이 없었더라면 영원한 민족 시인의 발자취는 미궁에 빠질 뻔했다. 1943년 교토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사상범으로 투옥되어 2년의 옥고 끝에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인체실험의 주사인지 뭔지를 맞고 생을 마감한 그의 28살 생애가 시의 깊이를 더해준다.
윤동주의 시를 왜 붙여 놓았느냐는 질문에 러시아인 여주인은 자신은 시를 좋아하며, 고려인 문인들이 카페를 많이 찾기 때문이라 한다. 그녀는 윤동주의 다른 시 <별 헤는 밤>이 적힌 종이를 같은 여자인 정은숙에게 건네주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정은숙이 자연스럽게 시낭송을 하였고, 낭송이 끝나자 아리랑이 함께 불렸다. 박경석이 시인은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으스름한 시간의 카페가 60년 전의 분위기로 돌아가는 것 같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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