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트레킹
여자도 할 수 있네
제26회
아바친스키와 코략스키
이른 저녁 무렵 날리체보 국립공원에서 헬기로 직접 아바친스키 베이스캠프 산장으로 갔다. 목조 건물의 산장은 보기에 아늑해 보인다. 거기에서 일박을 하며 여정을 소화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경험이라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밤 9시인데도 바깥은 훤하다. 일행은 백야에 화산의 만년설과 야생화를 감상하려 바깥으로 나와 있다. 사공박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어 홍기연을 산장 테라스로 데리고 나가려 한다. 그런데 침대에 자석처럼 붙어 누워 있는 그녀.
“저는 자야겠어요. 좀 피곤하기도 하고요.”
홍기연은 내일 계획된 트레킹을 위해 잠을 청하겠다고 했다. 여자로서는 무리한 여행일 수 있다.
“그럼, 알았어요. 혼자 나갔다 올 테니 좀 쉬어요.”
사공박이 나가고 홍기연이 혼자 남았다.
남녀가 한방에 있는 것은 창세기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고 부끄러움 없이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지만, 그녀가 생각해 보니 그들은 가상부부에 불과하다. 그녀는 가상부부 역할에서 보이지 않는 피로감을 느꼈다. 마치 두 정수의 비로 나눌 수 없는 무리수마냥 뭔가 정리되지 않는 기분이다.
“이런 피로는 처음이네.”
그녀는 말을 우물거리다가 쌓인 피로에 눌려 눈꺼풀이 감겨버렸다.
사공박은 테라스로 나가 연기를 뿜는 활화산 쪽으로 시선을 주며 원시의 저녁을 느끼고 있었다.
페트로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화산은 아바친스키(2,741미터)와 코략스키(3,456미터)이다. 가장 쉽게 가볼 수 있는 원추 활화산이다. 화산 봉우리의 생김새 때문에 전자는 어머니산, 후자는 아버지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젖가슴 같이 부드러운 봉우리와, 뾰족하게 솟은 원추형 봉우리의 완연한 대조 때문이다. 쌍을 이루고 있는 이 화산들은 외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재작년에는 차로 여기 왔었지.”
사공박은 차를 타고 힘들게 여기에 왔던 기억을 떠올렸다.
재작년 늦가을 사공박은 페트로에서 아바친스키 화산까지 차로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캠핑을 했었다. 화산 입구에서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특장차(군용차를 버스로 개조한 것)였다.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자갈밭 길을 달리는 중에 이리저리 흔들려 옆 사람과 어깨 부딪히기가 일쑤였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여인의 큰 젖무덤이 덜렁 그의 허벅지에 실리고 말았다. 너무 당황하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다. 서로 부대끼며 한 시간 반을 달린 후 하얀 설원이 펼쳐졌고, 거기서부터는 특장차가 아닌 설상차(만화에 나오는 장갑차 비슷한 것)로 베이스캠프(1,700미터)까지 간 일이 있었다. 힘들었지만 추억에 남는 트레킹이었다.
테라스에서 산장 부근 언덕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 사공박은 황홀한 장면에 마음이 끌렸다. 희미한 어둠이 깔린 언덕에 자색과 흰색의 야생화가 유달리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테라스에서 내려와 언덕으로 올라갔다.
“아, 에델바이스?"
고상하고 하얀 꽃.
아름다운 에델바이스 소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알프스에서 헤매다가 목숨을 잃었던가.
사공박은 에델바이스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민망한 광경에 잠시 눈을 돌려야만 했다.
홍기연의 윗옷 단추 두 개가 풀린 채 젖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덮지 않은 채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얇은 시트커버를 어깨까지 덮어 주는 그는 장난기가 스르르 발동했다.
에델바이스를 그녀의 코앞에 가져갔다. 반응이 없다.
이번에는 꽃을 그녀의 귀바퀴에 문질렀다. 역시 반응이 없다.
“이 아줌마 완전 목석이네.”
이번에는 MP3플레어를 꺼내 음악 하나를 올렸다.
<사운드 오브 뮤직>
그때 여자는 미동을 보였다.
눈을 비비면서.
“들어오셨어요? 근데 웬 음악?”
“알프스에 온 기분이 들어서.”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피곤하지만 맥주 한잔 해야지요.”
그녀의 의사를 타진했다.
맥주 한 캔씩 따고 난 그들은 각자의 침대로 들어갔다. 같은 침대로 들어갈 용기를 낼 정도의 알코올 농도는 아니었으니 가상부부는 이날도 착한 밤을 보냈다.
이튿날 여정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
최상의 컨디션에서 출발하더라도 베이스캠프에서 아바친스키 정상까지 오르는 데 여섯 시간 정도가 걸리고, 코략스키는 더 힘든 도전이 필요한데 노련한 등산가도 최소 열두 시간은 걸린다. 그래서 일행은 화산을 바라볼 수 있는 정도의 높이에서 트레킹을 멈추기로 했다.
산장에서 3시간을 걸어 올라갔다.
여기저기 이끼 풀에 솜털 같은 꽃이 핀 야생화가 아름답다. 야생화도 급격한 날씨 변화에 대비해서 털옷을 입는가 보다.
빙벽 옆에는 눈이 녹아 실개천으로 흐른다. 맑은 물맛이 좋다. 유황이 섞여 있지 않은, 가벼운 느낌의 물이다. 흘러내리는 길에 표면이 얼어버리는 마법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아바친스키 화산의 한참 왼쪽에 코략스키 화산이 마주보고 있다.
“두 화산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깁시다.”
사공박이 홍기연과 함께 두 산이 배경에 들어오도록 사진을 찍으려 하자 가이드가 다가와서 크게 웃으라며 찰칵했다. 만약 입을 맞추라 했더라면 당황할 뻔했는데, 유황 냄새가 한입 들어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러시아식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는 것은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화산을 배경으로 둘러 앉아 있는 모습, 사진이 장면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산 중턱 눈이 쌓인 설원에서 일행은 멈췄다. 비닐 포대기를 엉덩이에 깔고 눈썰매를 타자는 것이다. 부부들이 대부분이라 짝을 만들었다. 사공박과 홍기연도 썰매 자세로 들어갔다.
“꼭 잡아야 해요. 놓치면 떼어 놓고 갑니다.”
사공박의 말에 홍기연이 뒤쪽에 앉아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일주일 동안 캄차카를 여행했지만 몸무게와 체온이 느껴진 스킨십은 이번이 처음이다.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 두 사람은 거머리 같이 붙었다.
그런데 중턱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두 바퀴를 굴렀는데 한 바퀴는 붙은 채로, 한 바퀴는 떨어진 채였다. 물론 설원이어서 다치지는 않았다. 다른 짝들은 넘어지지 않았는데 일부러 넘어졌다고 의심 받을 만하다.
코략스키 화산 쪽으로 가기 위해 두 시간을 더 소비했다. 메케한 유황 냄새를 맡고,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한참 동안 자연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산중턱 눈이 녹은 곳은 야생화가 만발했는데 길이 질펀해 걷기가 힘들다.
“여기도 에델바이스!”
홍기연이 한 송이를 꺾어 자신의 귀에 꽂았다. 어제 저녁 사공박이 귀바퀴를 문질은 것을 지금 회상해 내듯.
마을 근처 개울에 왔을 때 개울 안에 웅덩이를 만들어 놓은 곳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러시아인이 보였다. 웅덩이 쪽은 온천욕이요 바깥 개천은 냉수욕이다. 웅덩이마다 온도가 다르다. 여러 종류의 미네랄이 많은 천연온천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 무섭지 않아요?”
트레킹 객이 온천 객에게 물었다.
“일상처럼 보아온 화산이니까요.”
해발 850미터 산장은 야생화, 일천 미터 부근에는 눈이 쌓여 있고, 이천 미터에서는 아바친스키 화산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겨울에는 산장에도 눈이 5미터까지 쌓일 때가 있지만.
화산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온천수를 잘 이용한다. 90도의 온천수를 40도 정도로 식혀 파이프라인을 통해 식물을 키우기도 한다.
인근의 한 주민은 개를 50마리를 키운다. 썰매견들이다. 8마리가 끄는 눈썰매가 열심히 설원을 달리는 연습을 한다. 세계 개썰매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했다고 자랑한다. 끄는 힘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속력이 나가지 않고 힘이 드므로 선두 개가 참으로 중요하다.
마을을 떠나야 할 시간에 모두들 화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바친스키야 잘있거라!”
사람이나 화산이나 나이 들면 죽는다. 벌겋게 타오르는 화산도 때가 되면 곡기를 멈춘 사람처럼 열기를 멈추고 숨을 끊는다. 불로초를 찾는 것은 자연에 대한 불경죄다.
산장에서 헬기를 타고 페트로 시내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으나 여름 서쪽하늘은 여전히 훤하다.
▲알파인 스키장을 만들 때나 눈길을 달릴 때 사용하는 설상차
▲코략스키 화산이 보이는 산장
▲아바친스키 화산(여름)
▲아바친스키 화산(겨울)
▲코략스키 화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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