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항해사
남극 탐사 두 번째 항해의 목적은
장보고과학기지 건설을 위한 준비
2011년 2월 3일에서15일까지
장보고기지 각종 탐사 이야기
18. 제2차 남극항해
우리의 여성항해사 양외란은 2010년 겨울엔 남극을, 여름엔 북극을 다녀와서, 2011년 겨울을 맞이하여 다시 남극으로 항해할 채비에 들어갔다.
딸을 염려하는 전계린 박사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딸과 단둘이 저녁상 자리에서 어머니는 근심의 속내를 드러냈다.
“외란아, 남극과 북극을 다 항해해 봤으니 이제 다른 배를 타든지 육상 근무를 하든지 그 배에서 내리면 안 되겠니?”
“엄만 제가 걱정되세요? 전 항해사예요.”
애지중지하는 딸이 또 남극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이젠 바짓가랑이 혹은 스커트 자락이라도 잡아 말리고 싶었다.
“남극에 어디 귀신이라도 두고 왔니? 왜 그리 고집을 부려.”
딸의 고집은 전혀 타협의 대상이 안 되는 줄 안다. 이혼한 아빠의 고집도 대단했었다. 엄마 고집도 만만찮은데 아빠의 고집을 포개 놓았으니 그 고집은 시멘트 벽돌이다.
“엄마, 극지 전문가가 되려는 딸의 진로를 지원해주세요. 이번엔 장보고기지 건설 답사이므로 아주 소중한 항해예요.”
결국 엄마는 출항하는 오후 부두까지 딸의 가방 하나를 들어주고 말았다.
양외란의 사촌 오빠도 전송 나왔다.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늦깎이 대학원생인데 주제를 태평양만큼이나 넓게 잡아 서론만 쓰고 본론의 소제목조차 분류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두 살 위의 오빠다. 불쌍하기 그지없다.
“오빠는 논문을 쓰는 거야 마는 거야?”
양외란은 자신이 누나라도 되는 것처럼 호되게 몰아붙였다.
“다 외란 니 때문에 주눅이 들었어.”
“그게 무슨 뜻이야?”
“어릴 때 기억 안 나? 소꿉장난할 때 니 치맛자락 들췄다고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혼났니. 그때부터 난 자신감이 꺾여버렸어.”
“장난은?”
고교까지 둘은 연인처럼 친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외란이 부산에서 대학기숙사 생활할 때 사촌 여동생을 위로해주기 위해 주말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오곤 했던 카즌(cousin)이다. 고마웠다.
어제 신문에서는 색다른 뉴스가 나왔다. 중국에서 대학3년 남학생과 대학초년 여학생이 2년간 사귄 후 연인관계로 발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23년 전에 입양으로 헤어진 여동생이었다는 것. 어떻게 알았을까. 조카의 여자친구를 보러 온 고모가 여학생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조카의 엄마와 너무 닮아서. 결국 DNA 검사를 한 결과 친남매라는 것이 확인됐다.
이것에 비하면 사촌간의 연인은 부담 없는 데이트 상대다.
“남자친구 하나 물색해놓을 테니 몸 건강히 잘 지내다 귀국하라고.”
사촌오빠는 귀항 대신 귀국이라는 말로 배웅해줬다.
“남자친구 물색은 사양할 테니 논문이나 빨리 끝내.”
주눅 들지 않도록 양외란은 살짝 말해줬다.
배는 미끄러져 인천항을 빠져나왔고, 엄마와 사촌오빠는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외로운 남극항해가 시작됐다.
친구처럼 의지가 됐던 장세빈 언니는 북극항해를 끝으로 하선하여 연구소로 돌아갔다.
새로 승선한 삼기사 맹수식이 친구하자고 가까이 다가오는데 밥맛이 별로였다.
탁구를 좋아하는 삼기사는 탁구 스파링 상대로 양외란을 지목하고는 자꾸 시합을 하자고 했다. 물론 당직 시간대가 같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양외란의 스매싱을 받아내지 못해 콜라를 몇 번 샀는지 모른다. 여자가 왜 그리 힘이 좋으냐고 묻는 대신 ‘힘 남으면 기관실 실린더 뺄 때 도와줘’ 하면서 엉뚱하게 양외란을 남자 취급하는 것은 경기에 진 분풀이도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구릿빛 살결에 매혹돼버렸다는 사실이 나중에 맹수식의 고백에서 알게 되었다.
여자의 선박지식에 남자는 또 한 번 놀랐다.
언젠가 양외란이 당직중인 삼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타기실 솔레노이드밸브 접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점검 좀 해줄래?”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나이가 같으니 서로 말을 놓았다.
삼항사 양외란의 말에 삼기사 맹수식은 조타기실로 가서 유압 크기와 방향을 조절하는 솔레노이드밸브를 점검했다. 양외란의 예상대로 접촉이 불량했다. 족집게처럼 상태를 알아내는 여자의 선박지식에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여자의 매력에 가산점이 붙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다보면 땀이 흐르고, 땀이 흐르다보면 옷이 흘러내릴 수 있다. 탁구공이 빠르게 네트를 넘나드는 중에 양외란의 윗옷이 어깨에서 약간 흘러내렸다. 젖무덤이 반쯤 드러나자 맹수식은 시선을 갖다 댈 만한 곳을 찾지 못해 그만 큰 점수 차로 지고 말았다. 이번엔 시원한 맥주를 사서 여자에게 바쳤다.
남성이 여성에 대해 충동을 느낄 때는 여성이 섹시한 옷을 입을 때, 홈이 파인 옷을 입고 있을 때, 여성이 다이어트 성공할 때, 샤워한 후라고 한다.
땀에 젖은 여성의 건강미를 봤을 때 느낌은 어땠을까.
그들은 땀을 식힐 만큼 맥주를 마셨다.
양외란은 다음 당직이 신경 쓰였다.
“이 정도는 음주당직이 되지 않겠지?”
“저녁당직까진 다섯 시간이나 남았어. 그전에 다 깬다구. 저녁당직 후 한 판 더 할까?”
“엉뚱한 생각 마. 야밤중에 운동하는 사람이 어딨어. 니 맥주는 하루에 한 번으로 족해.”
양외란이 딱 잘라 말했다.
면세가격의 맥주에 호주머니 부담은 별로 없다. 맹수식은 다만 알코올 기운에 젖어있는 여성의 매력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는 여성을 사랑하는 갈등에 빠졌다. 걸림돌은 양외란이 그를 직업 동료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안에서 이성을 대하는 것은 불편하다. 도망갈 데가 없다.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한 상사화의 사연을 감안하여 거리를 두면 좋겠지만 시선을 피하기가 쉽지 않다. 선내의사는 상사병에 효험이 있는 약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사랑의 문제는 해결할 공구가 없다. 드라이버, 스패너, 펜치, 드릴 어느 것도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삼기사 맹수식의 사랑 열병은 남극의 얼음으로 식힐 도리밖에 없는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시티의 리틀턴항에 도착하자 탐사대원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양외란에겐 리틀턴항 입항이 두 번째다. 낯익은 곳이다.
뉴질랜드를 출항하기 전 라디오에서 뉴질랜드 민요 연가가 흘러나왔다. 대학 MT 가서 많이 부르던 노래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그대 오늘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그대만을 기다리리
내 사랑 영원히 기다리리
바다 단어가 나오면 가슴이 울렁대는 것 어쩔 수 없다. 직업상 언어로 감성화돼 버린다. 마도로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연인의 심정이 잘 드러난 민요로 여겨졌다.
▲탁구장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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