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변하고
러시아가 변하고
사할린도 변한다
어떻게 변할까
제20회
호텔 이야기
사할린 섬은 겨울이면 육지가 된다. 본토와 섬 사이의 타타르 해협이 얼기 때문이다. 가장 좁은 곳은 불과 7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아 연륙교를 지을 수 있고, 해저터널을 뚫을 수도 있다. 사실 스탈린 말기에 해저터널 공사를 준비했으나 독재자가 죽는 바람에 중단됐다. 죄수의 사면으로 공사할 노무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만주어에서 비롯된 사할린은 ‘검은 하천’이라는 뜻이다. 땅을 파면 여기저기서 검은 흙이 나온다. 최근 해안에서 기름구멍이 발견된 것도 이름에서 예견된 것은 아닐까.
사공박은 칠 년 전 사할린에서 호텔을 인수할 뻔한 일을 회상했다.
미치코 사장이 호텔 로비까지 마중 나와 손을 꼭 잡으며 응접실로 안내했다.
“사공 사장님, 호텔 인수를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일본에 급히 가야 해서요.”
여사장은 구두로 합의했으니 빨리 사인할 것을 재촉했다.
석유가 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던 때라 미치코 사장은 산타리노 호텔을 빨리 처분하고 싶었다. 일본 메이저들이 석유탐사를 포기하고 철수하려는 마당에 그녀가 사할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던 호텔이었으니 철수의 이유는 더욱 분명해진 것이다.
“객실 반도 차지 않는 호텔을 인수하는 것이 사실 부담도 되고…….”
사공박은 일부러 말과 행동을 느릿하게 했다. 이럴수록 상대방은 안달이 될 수밖에 없다. 관광객이 줄어들어 공실이 늘어나는 호텔을 처분하려는 욕심 때문에 그녀는 그의 미지근한 태도에 인내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다.
“그럼 우리 식사라도 하면서 찬찬히 이야기해 보죠.”
미치코가 안내한 곳은 식당이 아니라 접대실이 딸린 최상층 개인 사무실이었다. 스위트룸처럼 크고 화려했다. 작은 호텔에 스위트룸이라니? 큰 호텔에만 있으라는 법이 없긴 하지만.
“오늘 바깥 날씨가 춥다고 하여 외투를 두텁게 입었더니 거북스럽네요. 간편하게 입고 나올 테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황금색 문고리를 제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그녀는 정말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너무 간편하여 풍만한 허리가 옆이 트인 드레스를 비집고 나왔다. 상당한 크기의 가슴과 힙이 신체 곡선을 적절히 형성하려는데 허리 부분에서 라인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일시금이 어렵다면 나눠서 결제하셔도 되고요.”
구매자가 너무 느긋하게 나오는 것 같아 그녀는 지불 문제를 먼저 꺼냈다. 사공박은 약간의 혼란에 빠져야만 했다. 왜 자신이 이 자리에 와 있는지 혼돈스러웠다. 계약 관계보다 시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가 급선무였다.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라서…….”
이번에는 과분하게 드러난 여자의 앞가슴이 그의 시선을 팽팽한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남자의 거북스러움을 눈치 채고 벽장으로 간 여자는 와인 한 병을 가져와서 테이블에 놓았다.
“아끼고 아끼던 와인인데 결국, 사공 사장님 앞에 내어 놓게 되네요.”
와인 병을 본 사공박은 30년이라는 숫자만 읽고 뒷면에 숨은 브랜드명은 확인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송구스럽기도…….”
“제가 지은 호텔이라 미련이 많지만, 사장님이라면 잘 경영하시리라 믿어요.”
그녀는 이미 준비한 계약서를 내놓았다. 계약금 10퍼센트, 잔금 2개월 내로 지불하는 조건으로 돼 있다.
사공박은 어느 정도 결심은 돼 있으나 막상 계약을 하려니 자금 사정이 마음에 걸렸다.
“형편상 계약금 5퍼센트, 잔금 6개월로 하면 안 될까요?”
어쩐 일인지 그녀는 요구한 대로 순순히 받아주었다.
호텔 인수 건은 여기까지였다.
계약 후 2개월쯤 엑손 커피숍에서 미치코 사장을 만난 사공박은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만, 동업자가 계약 해지를 요구해서요.”
황당해서 그는 한참동안 미치코를 응시했다. 실제로 동업자가 있는지를 모르겠으나 최근의 경제 동향으로 봐선 그녀가 마음을 돌려먹을 만도 하다. 오호츠크해에서 엑손이 대유전을 발견한 것이다. 신문은 사할린 개발이 지금부터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렇다고 그가 손해 본 것은 아니나 계약해지는 그에게 씁쓸한 일이었다. 계약금 10퍼센트를 그대로 유지할 걸, 하는 후회는 아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뭔가 허전하기만 했을 뿐이다.
“계약이란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로군.”
독백하며 호텔 사업은 자신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시내 6개의 호텔과 여관도 매물 시장에서 숨어버렸다.
“미안해서 어쩌죠?”
미치코 사장은 정말 미안한 표정이다. 그래서 사공박이 사할린에 머무는 동안 산타리노 호텔 스위트룸을 자유로이 이용해도 좋다고 말했다. 숙박료는 줘도 안 줘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그렇다고 이미 끝난 일인데 염치없이 호텔을 이용할 그가 아니다. 그녀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세상에 장담할 일이 없음을 깨닫게 한 것은 얼마 후의 일이다.
2004년 겨울 사공박이 사할린 출장 업무를 마치고 출국하려는데 갑작스런 폭설로 사할린 공항이 폐쇄되고 말았다. 투숙하고 있던 미르 호텔은 예약기간이 끝나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시내 모든 호텔과 여관은 갑자기 발이 묶인 여행객들로 빈방이 동이나 버렸다.
궁하면 염치는 사치라고 했던지, 사공박은 산타리노호텔에 연락했다.
“미치코 사장님, 오늘 기상특보 들으셨죠?”
설명을 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듯 그녀는 지체 말고 자기 호텔로 오라고 했다.
“사공 사장님, 이쯤 되면 저도 도덕적 책임은 면한 거예요.”
눈을 흠뻑 덮어쓴 사공박의 코트를 받아들고 미치코는 호기스럽게 말했다.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을 것같이 호언하던 그의 기백은 사라지고 그저 어린애처럼 수줍어하는 것이 안타깝게 보일 뿐이다.
이날 밤 바깥 날씨는 아주 쌀쌀했고, 호텔 주위는 50센티 이상 쌓인 눈으로 하얀 세상이 돼버렸다. 마치 흰 벽돌의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두 남녀는 단절된 또 하나의 세상을 체험하며 보드카로 열기를 돋우었다. 무리하게 취한 나머지 따로 침대 쓰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황당한 실수의 스토리는 사할린 방문 일행에게 흥미로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이러니 일행의 어느 누구도 사공박이 한때 형편없이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 턱이 없다
사할린의 변화
일행은 사공박이 처음 사할린에 진출했을 때의 경험담을 듣고 싶어 했다. 마침 백화점 지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하루 일과를 정리하는 시간이라 여유가 있었다.
까짓것 들려줘야지.
2001년부터 부분적인 토지사유화 바람을 타고 2005년 무렵 사할린 부동산 시장은 활황을 만났다. 백화점, 건자재 도매상, 보안업체 등이 이때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사할린 주민들이 운영하는 구멍가게를 보고 사공박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게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면 안 되는데…….”
도둑을 막느라 가게는 손님이 직접 물건을 고를 수 없는 구조였다. 유리창 너머로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주인이 물건을 내주는 식이다. ⌜죄와 벌⌟에 나오는 전당포 노파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오픈형 슈퍼마켓으로 개조하자!”
사공박의 머리에 전광석화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곧 한인 부부가 운영하는 구멍가게를 인수했다. 전혀 새로운 구조로 변경했다. 이것이 사할린에서 처음 등장한 오픈형 슈퍼마켓이다.
절도방지를 위해 상품마다 전자꼬리표를 붙였다. 계산하지 않고 나갈 경우 경보가 울리는 기술은 한국으로부터 들여온 것이다. 가게를 판 사람이 오히려 걱정하는 눈치였다.
“여긴 물건이 잘 없어지는데, 괜찮을 까요?”
모스크바에서 이미 시행한 것이지만 사할린에서는 처음이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대한 대로 사할린 주민에게 인기를 끌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꼬박꼬박 현찰이 들어와 비즈니스의 기반이 다져졌다.
사유화라 하지만 완전한 사유화가 아니고 법에 따라 50년 동안 임차하는 형식이었다. 그렇지만 개발의 붐을 탄다면 임차권마저 돈이 되리라 예상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국의 중견 기업인에게 백화점 건설을 권유했다. 그들은 사할린 주요 지역의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면 좋겠어요.”
발주 기업인에게 권유한 나머지 5층짜리 백화점에 에스컬레이터를 놓았다. 소문이 시내 곳곳에 퍼져 화제가 됐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한국처럼 지하 식당은 시내 대표적인 음식점으로 자리잡아 주민들의 회식장소로 애용되기도 했다.
일행은 사공박을 새로운 시각으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이 바로 사할린 백화점의 개척자로구나.
“모든 게 순조롭게 된 건가요?”
건설업을 하는 방노찬 장로의 관심이 가장 강렬했다.
“순조로우면 저 같은 사람이 덤빌 수 있겠어요? 백화점 건설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난이고 다음이 자재난이죠.”
사공박의 사할린 현지 법인은 건축자재와 인력 공급을 맡았다. 건설 초기 기술력이 있고 말이 통하는 북한 인부들을 데려다 일을 시켰다. 러시아 이민국을 통해 북한 인부 백여 명을 수입했다.
“물론 북한 측에 수천만 원의 수수료를 건넸지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북한 인부들은 현장에 도착하자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불만만 털어놓았다. 북한 체제에서 일하던 방식이 사공박의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지급한 돈을 고스란히 손실로 처리하고, 인부들을 모두 북한으로 돌려보냈지요.”
이후 의사소통이 다소 어려워도 중국인과 고려인을 중심으로 인부를 모집해 일을 맡겼다. 이들은 북한 주민처럼 사회주의권에서 성장했지만 좀 일찍이 개방의 물을 먹어 약속한 일은 완수했다. 그들과 수년 동안 일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다.
북한 인부를 데리고 있을 때 그들의 숙소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들은 사할린 변두리 삼류여관에서 단체 투숙을 하고 있었다.
“감옥이 따로 없더군요. 외출은 당 지배인의 허가를 받아야 했어요. 외박은 아예 되지 않고요.”
외박이 허락된다하더라도 돈이 없으니 허가는 무용지물이겠지.
“생활 잡일은 누가 하나요?”
이사라 여사가 궁금한 나머지 질문을 많이 했다.
“요리와 빨래, 허드렛일은 북한에서 온 여성 몇 명이 맡고 있더라고요.”
공사 계약기간 내에는 북한에 가지 못하는데 그게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모른다. 남자들은 본능적으로 남성 해결이 문제가 되겠는데, 아마 여성에게도 다르지 않으리라. 그래서 결국 일이 터졌다.
“어떻게 되었나요?”
“남녀 근로자가 관계를 했는데 발각되었지요.”
한 근무 조장이 여성 동무를 알게 됐다. 장소가 세탁실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몸이 잘 숨겨졌다고 생각했으나, 마침 세탁물을 옮기는 여성이 발견한 것이다. 잘 익은 감자처럼 벗은 모양이 드러나 버렸다. 심야 시간은 거의 안심할 만한데 하필 이날 세탁물 여성이 미리 일을 줄이려고 세탁실에 들어간 것이다.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에서 당에 보고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건설자재 할인 사업은 날개를 달아 사할린 주민의 필수 쇼핑 코스가 됐다. 러시아인은 스스로 집을 수리하기 때문이다.
현지 직원들에게 열심히 일한 대가를 인센티브 형태로 지급했다. 아이디어를 내거나 실적이 뛰어난 사원과 고객에게 시상을 했다. 유니폼을 입혀 애사심을 심어줬다.
“뭐니 해도, 관료주의의 폐해를 뛰어넘는 게 힘들었어요.”
“어느 나라나 그런 것 아니겠어요.”
담당 공무원을 초청해 현장을 보여주고, 그가 집으로 돌아갈 때 따라가 승인 도장을 받은 결과 6개월 걸릴 것을 하루 만에 끝낸 적이 있었다.
“관료의 횡포에 대해 나름대로 비결이 더 있지요. 백화점을 세웠지만 모든 것이 주지사 덕분에 가능했다는 쪽으로 소문이 나도록 하죠.”
상층 관료는 모스크바에 잘 알려지길 원하는 속성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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