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내 조끼는

내 조끼는

오선닥 2022. 4. 6. 09:12

5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다가 새경으로 산등성 밭 하나를 얻어 살림 나온 노총각 강쇠가 산비탈에 초가삼간 하나를 짓고 화전을 일구어 이제 토실한 살림살이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어느 겨울 저녁

군불을 잔뜩 지핀 뜨뜻한 방안에 누워 색시 얻을 생각만 떠올리는데, 바깥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쇠 있는가?”

, ?”

귀에 익은 목소리에 문을 여니 윤첨지 안방마님이 보따리 하나를 이고 마당에 들어서는 게 아닌가. 강쇠는 맨발로 펄쩍 뛰어나가 아이구, 마님 이리 주십쇼.” 하며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그저께 김장했는데 자네 몫도 조금 챙겼네.”

보따리를 받아든 강쇠는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선 채 핑 도는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아이구 마님?”

자네 살림은 어떻게 하나 어디 한번 봄세.”

, , 뭐 볼게 있어야죠.”

마님은 강쇠의 만류에도 못 들은 체 부엌으로 들어가 그릇을 씻고 솥을 닦았다.

, 마님, 제가 닦을 테니까 쉬세요.”

, 다 됐네. 추우니까 방에 들어감세.”

방에 들어간 마님은 강쇠를 흘겨보더니,

김치항아리를 이고 개울을 건너다 발이 삐끗해 발목이 접쳤나 봐. 자네가 좀 주물러 주게.”

버선을 벗은 종아리를 내밀자 강쇠는 고개를 돌리고 발목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우, 시원하다. ~원해. 그럼 무릎도 좀.”

?”

마님이 이번에는 고쟁이를 걷어 올리는데 허연 허벅지가 드러났다.

마님이 갑자기 강쇠의 목을 껴안고 넘어지자 강쇠의 숨소리가 가파졌다.

여자의 농익은 몸은 불덩어리가 되고 남자의 허리는 굳어져 갔다.

열이 식고 뒤돌아 꿇어앉아 바지춤을 올리며 강쇠는 모기만 한 소리를 냈다.

마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님은 십년 묵은 체증이 가라앉은 듯 맑은 목소리로,

괜찮아. 자네가 오늘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해.”

오히려 강쇠를 위로했다.

그리고 마님은 넋두리마냥 고백에 들어갔다.

자네도 알다시피 바깥양반이란 게 허구한 날 젊은 계집 치마폭에 싸여서 한 달에 한 번도 집에 들어오는 일이 없으니.”

그 후 안방마님은 툭하면 떡이며, 호박죽이며, 고기를 들고 강쇠네 집으로 왔다.

 

어느 날 강쇠 품에 안긴 마님은,

나 힘들어 고개 넘고 개울 건너 여기까지 못 오겠네. 날이 어두워지면 자네가 우리 집으로 오게.”

어떻게 제가 감히?”

괜찮어. 사내가 모험을 즐길 줄 알아야지.”

대담하게도 안방마님은 강쇠를 안방까지 끌어들였다.

삼경(11~새벽 1) 무렵 난데없이 집에 잘 오질 않던 윤첨지가 대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라.”

이건 어르신 목소린데? 아이쿠 이를?”

강쇠는 놀랐지만 마님은 오히려 침착했다.

어서 뒷문으로 도망가게.”

강쇠는 바지만 걸쳐 입고 옷을 옆구리에 낀 채 봉창을 타고 빠져나와 뒷담을 넘어 달아났다.

너무 급한 나머지 집에 와서 보니 조끼를 두고 오고 말았다.

아이고. 내 조끼?”

강쇠는 불안에 떨었다.

나루터 주막집으로 혹은 머슴방으로, 봉놋방으로 동가식서가숙하던 강쇠는 어느 날 술에 취해 곰곰이 생각하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줄곧 도망 다니는 신세가 처량하고 한편으로는 윤첨지를 배신한 자신이 죽일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윤첨지는 방탕하지만 통 크고 인정 많아 5년 동안 머슴살이할 때 모진 소리 한번 하시지 않았지.”

이튿날은 윤첨지 조부 제삿날로 윤첨지가 본가에 머무는 것을 알고 강쇠가 찾아갔다.

윤첨지에게 잘못을 빌고 죽든지 살든지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술잔을 들다 말고 윤첨지가 , 강쇠 왔냐?” 위엄을 주어 말했다.

, 나리 저 실은.”

강쇠가 꿇어앉아 죽을죄를 지었다고 말하려는데 옆에 앉은 마님이 먼저 말했다,

어제도 강쇠가 영감 만나 의논하러 왔다가 헛걸음하고 갔지요.”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어 그게.”

강쇠가 더듬더듬하는데 마님이 대신 설명을 했다.

영감 그게 말이유강쇠가 부잣집 안방마님과 안방에서 정을 통하다 갑자기 바깥양반이 돌아와 뒷문으로 도망을 쳤는데 집에 가서 보니까 조끼를 두고 갔다지 뭡니까.”

허허, 그래서?”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샛서방을 안방까지 끌어들이는 여자라면 어련히 그 조끼를 처리했으려고.”

하하, 그럼 걱정할 것 없지. , 우리 강쇠 달리 봐야겠네.”

윤첨지는 아내의 이야기에 빠져 내용의 대상이 자신인 것조차 잊어버렸다.

불안한 강쇠는 , 그게 아니고.” 할 뻔했으나 안방마님의 임기응변에 그저 감탄하고 말았다.(퍼온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