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료의 채취는 연구에 중요한 부분
연구의 결과는 기득권 확보
미래에 기여하는 바가 큽니다
27. 중간기지 출항
2010년 7월 17일(토) 오전
배는 장비와 선식, 탑승자를 싣고 알래스카 놈 항을 출항했다.
본격적인 임무를 기다리고 있는 북극으로 향했다.
배가 갑자기 엉덩이를 들썩였다. 인천을 떠난 후 이렇게 건방지게 흔들리는 것은 처음이다. 북극으로 가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시위하는 것 같다. 북극의 해신이 파도를 충동질해서 겁을 먹이는 건지도 모른다.
점심때 식당에 갔더니 처음 보는 얼굴이 많았다.
5명이 하선하고 34명이 새로 승선했다. 결국 배의 식구는 선원 25명과 탑승원 46명, 도합 71명이 되었다. 사람 사는 맛을 느꼈다.
식당 벽에는 탑승자들의 사진이 붙였다. 모두 어제 찍은 사진들이다. 여럿이 찍은 것과 혼자 찍은 것, 배경이 해안인 것과 갑판인 것 가지각색이다. 얼굴의 주인공을 화살표로 끌어내 이름을 영문으로 적어놓았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발상이 좋았다.
여자의 머리수를 세어보니 모두 7명.
외국 여자는 중국과 필리핀이 각각 한 명씩이다.
“일곱 명 중 가장 스마트한 여자는?”
동기생 남성 삼기사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러곤 양외란을 가리켰다.
여자의 반응이 부드러울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가장 예쁜 여자라고 하면 덧나니? 쫀쫀하고 인색하긴….”
“스마트한 거나 예쁜 거나 같은 뜻 아냐?”
“말 돌리지 마. 어쨌든 고마워.”
둘은 동시에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외국인은 모두 10명으로, 중국 연구원 3명, 필리핀 여학생 한 명, 러시아 유빙항해사 2명, 나머지 4명은 미국인으로 헬리콥터 조종사 두 명, 정비사 그리고 북극곰감시인이다.
파고 2미터를 헤치고 북북서 방향으로 가던 배는 베링해협 중앙에 있는 디오메드(Diomede) 섬을 지나자 정북 방향으로 변침했다. 큰 디오메드(러시아)와 작은 디오메드(미국) 사이에는 날짜변경선이 지나는데, 두 섬은 4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베링해협은 지금은 해협이지만 마지막 빙하기에는 아시아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수심이 46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옛날에는 육지가 됐을 법합니다.”
러시아 유빙항해사로부터 설명을 들은 선장은 수긍했다.
베링해를 빠져나온 배는 바로 북극권(66°33‘)에 진입했다. 한여름에는 낮만 계속되는 지역이다. 68도를 지나자 인터넷이 뚝 끊어졌다. 문명세계는 이렇게 단절된다.
밤에도 훤한 북극 바다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선교로 올라오는 일이 잦았다.
『선교출입은 수석 연구원의 허락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선장은 방을 붙이고 말았다. 사람들이 들락거려 배 운항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당직항해사한테 질문 안 할 테니 사진 한 장 찍으면 안 되느냐고, 사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간기지를 출항한 지 이틀째
수온 7.6도, 염분 30.1‰, 기온 4도 부근
물은 그다지 짜지 않다.
점심 메뉴는 무엇으로 할까. 매끼마다 주방장의 단골 고민이다.
“그까짓 거 비빔밥으로 하죠. 각 나라 재료 하나씩 넣어서…. 그러면 누구도 불평이 없을 테고.”
옆에 있던 한 연구원이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것 괜찮네요. 저도 비빔밥 좋아해요.”
한국의 대학에서 유학 중에 있는 필리핀 여학생이 동조했다.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듯 주방장은 당장 비빔밥 요리에 들어갔다.
백 가지 나물을 먹는다는 백중날도 아닌데 여덟 가지 이상의 나물이 동원됐다.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버섯, 호박나물, 콩나물, 가지, 무채…….
고추장과 참기름은 필수 첨가물.
구수한 김도 썰어 넣었네.
비빔밥은 졸지에 다국적 메뉴로 등장했다. 모두들 맛있다(delicious)는 말을 연발했다.
오후 5시 배가 유빙해역에 들어가 얼음에 부딪쳐 크게 흔들렸으나 비빔밥의 힘 때문인지 탑승자들은 잘 견뎌냈다. 10퍼센트쯤 깔린 유빙은 쇄빙선이 깨기에는 시시한 얼음이다.
선령 28년의 독일 쇄빙선에서 연구한 바 있는 한 연구원은 독일은 7천억 원짜리 쇄빙선을 건조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라빙호의 거의 6배나 되는 가격. 최첨단 극지탐사선이 될 거라고 하는데, 도대체 선박에 보석이라도 박았단 말인가.
북위 72도를 지났을 때 유빙이 많이 보였다.
아침 시간 수온 0.6도 염분 28.9%, 기온 -2.3도.
처음으로 기온은 영하로 떨어졌다. 여름 남극의 세종기지보다 낮은 온도라고 한다.
해빙(海氷)이 덮인 북극의 바다는 남극의 바다와 다르다.
바닷물이 얼어서 생긴 것은 같지만 남극의 해빙은 대개의 경우 빙붕에서 갈라져 나온 탁상형 빙산으로 높이 수십 미터, 폭이 수십 킬로미터인 것이 있다. 시야에 빙산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면 기울어지고 부서져서 원래의 평탄한 모습은 사라진다.
그러나 북극 해빙은 두께가 일 미터도 안 된 조각 얼음들로 늘려져 있다. 물론 그린란드나 캐나다 북쪽 섬에서 떨어져 나온 빙하가 바다에 들어와 생긴 불규칙한 빙산이 있지만 크기 면에서 남극의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위도가 낮은 척치해는 그런 빙산마저 없다.
“북극의 해빙은 정말 질서가 없군요. 해류에 따라 떠다니다가 이리저리 부딪히고 다시 얼음이 엉켜 붙으니 말입니다.”
남극에 갔다 온 양외란은 남극에 가본 적이 없는 연구원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남극의 해빙은 대륙을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잘 부딪히지 않는다.
만약(if)이라는 단어가 없다면 보험회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배에 비치해둔 생존장비 가방은 몇 ppm에 해당하는 위험 확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일까.
“내용물이 뭔지 샘플을 한번 열어보겠습니다.”
일항사가 안전훈련의 한 과정으로 플라스틱 밴드를 풀고 지퍼를 열었을 때 내용물이 드러났다. 스위스나이프, 방한복, 수밀성냥, 구급상자, 스카프, 낚시도구, 손전등, 바느질, 비상신호….
로빈슨 크루소가 이런 장비만 가졌더라도 문명생활을 했을 것 같다.
“내용물의 가격이 350만 원어치나 돼 하선할 때 꼭 반납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장비지요.”
“제발 그 350만 원짜리를 사용하지 않았음 좋겠네요.”
선내에서 손 여사로 통하는 연구원이 일항사의 설명에 반응한 것이다.
“저도 그런 행운을 빕니다.”
일항사의 능청도 수준급.
배가 쉬지 않고 쿵쿵거렸다. 미국의 배타경제수역을 벗어나 40해리쯤 됐을 때 각종 연구 장비들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유빙항해사는 지금 깨고 있는 얼음이 두께 60센티미터 정도라고 한다.
그런데 얼마쯤 가던 배는 속도가 느려졌다. 얼음 두께가 1.2미터로 두꺼워진 탓이다. 백 미터가량 뒤로 물러나 다시 전진했을 때 바닷물이 심하게 요동치고 얼음덩어리가 구르면서 밀려났다.
얼음 속에 갇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배가 거의 멈춰 있는 틈을 타서 연구원들은 20리터짜리 채수통 12개로 된 로제트 샘플러를 내려 채수하기 시작했다. 바다의 모든 생물을 먹여 살리는 바닷물은 생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이 그 성분을 알고 싶어 한다.
극지연구원들은 얼음 등 연구재료를 채집했다.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 여자 과학자는 오염물질을 연구한다. 그녀는 연구 공유를 위해 승선했다.
“외국 연구원을 태우면 연구자료는 잘 줍니까?”
궁금했던 사항을 양외란이 수석 연구원에게 물었다.
“그게 좀 민감한 부분인데 다 주는 것은 아니지. 일정 부분 양해하는 것으로 약정을 한다든지…. 그래서 연구원을 교차 승선시켜 자료를 주고받는 방안을 협의하곤 하지.”
해빙의 감소 원인을 분석하는 데 특수한 장비가 필요하다. 스코틀랜드 해양연구소는 해빙질량평형측정기 2대를 빌려주었는데, 한 대 일억 원이나 하는 고가 장비를 대여해주는 대신 측정된 자료를 공유하는 조건이다.
“세상에 공짜가 없군요.”
“그러니까 우리가 자체 쇄빙선을 보유하는 거랍니다.”
옆에 있던 한 연구원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는 외국 탐사선에 편승해 자료를 가져나오다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수석 연구원은 35년 전의 일을 상기시켰다. 미 의회에서 로비활동을 벌이다가 스파이 혐의로 구속된 박동선 씨는 진정한 애국자라는 것이다.
장소를 옮겨 이번에는 퇴적물 채집에 들어갔다. 멀티 코어러(Multi-corer)는 한 번에 한 개가 아니라 8개를 시추하는 새로운 시추기이다.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라 반 정도의 성공이었다.
시료는 실험실에서 1센티미터씩 잘라서 보관해뒀다가 현미경으로 연구한다. 수천 년 전의 기후와 변화를 알아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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