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 4회)

오선닥 2016. 2. 15. 19:29

연해주에서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우수리스크
그들은
어떻게 정착하고 있나?


▲연해주의 시골마을




제 4회



고려인문화센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20㎞ 떨어진 우수리스크는 인구 16만명 중 고려인 2만명가량이 사는 도시이다. 쭉 펼쳐진 가로수 길은 한국 시골의 느긋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데 독립운동 유적지가 너무 쓸쓸하다.


“남북이 분단돼 좀 더 자주 올 수 없는 게 아쉽네요.”


남한에서 육로로 여기까지 여행했으면 좋겠다는 희망 조로 누군가 말했다.


우수리스크 시내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는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으로 2004년 발의하여 2009년 설립되었다. 발해시대와 한인 연해주 이주 역사를 살펴보는 전시관을 비롯해 공연장, 교육문화센터, 도서관, 병원, 사무실 등이 있다.


여기 문화센터는 더욱 한국을 느끼게 한다. 고려인 역경의 삶이 전시돼 있어 짠한 기분마저 느낀다. 엉성하게 그려진 태극기가 옛날의 애국을 표현하기도.


우수리스크 내에서 화장실이 가장 많은 고려인문화센터.
진화된 한국 화장실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피로에 지친 배설물을 빼면서도 근처 농장에 뿌리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무엇 때문일까.


유적지들의 보존이 느슨한 것은 이주와 재이주의 참담한 역사의 이유도 있지만 러시아 정부가 소수민족의 단결을 싫어해 철거에 대한 압박이 컸던 면도 있는 것 같다.


이상설 유허비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고려인문화센터 옆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비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2년 블라디보스토크 의과대학에 세운 기념비는 2012년 갑자기 철거되어 최근 이곳으로 옮겨졌다.


“죽어서도 유랑신세가 되는 게 소수민족의 운명인가 봐요.”


이렇게 말하는 정은숙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보일 뻔했다.


안 의사 기념비에서 10분 거리인 최재형 선생 고택도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선생을 기리는 유품은 전혀 없다. 그는 이상설, 홍범도, 안중근 의사와 함께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던가.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문화센터



발해 광야


2004년 이주14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고려인농업이주정착지원사업’이 시작되었다. 극동평화연대를 중심으로 한국의 시민단체들에 의해 6개 농업마을을 만드는 사업이다.


고려인은 1864년부터 일제침략을 견디다 못해 연해주로 이주한 후 러시아 국적을 얻어 소수민족으로 살아왔으나 1937년 연해주 고려인 17만명 전원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고는 중앙아시아 역외 이주가 금지됐다. 그러다가 1990년대 다시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땅 연해주로 재이주를 시작했다.


김연동 평화연대 연해주 대표의 설명을 듣던 사공박은 울분이 넘쳐 중간에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집시도 아닌데 이렇게 재이주 보따리까지 쌌어야 합니까?”


이 정도의 질문은 예상했다는 듯 김연동은 대답 대신 설명만 계속한다.


“유라시아 유랑의 세월에서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모범적 집단농장을 일궈 성공했으나 독립국가가 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 언어 사용을 강제하고 소수 민족을 차별화함으로써 견디지 못한 고려인은 고향 땅 연해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지요.”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정부가 1993년 고려인 강제이주 관련 명예회복에 대한 법적 및 행정적 조치를 취하고 후속으로 1997년 연해주 정부는 군대 철수 지역을 영구 무상 임대해줬지만 소련연방 해체와 계획경제 하의 지원이 끊겨 콜호즈, 소포즈 등 국영농장과 집단농장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 결과 경쟁력이 좋은 중국 농산물로 채워지곤 했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따뜻한 기후에 익숙해진 고려인들이 한랭한 연해주 기후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무일푼의 고려인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설상가상으로 1999년부터 3년간 이어진 이상기후로 대흉작을 맞이했다.


“이대로 좌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연동의 설명은 이어진다.


철수한 러시아군 주둔지의 아파트들은 오랫동안 방치돼 있어 고쳐 사용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고려인만의 자력갱생이 어렵다는 판단 하에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협력 프로그램에 착수한 것이다. 극동평화연대가 참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연해주 농업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인이 필요하다. 아마도 2만명의 고려인이 농사에 참여하면 해결될 것으로 믿고 있다. 우수리스크에 2만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지만 이들이 다 농사에 종사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인구 유입을 위해서는 농업개혁이 필요하고 유기농산물의 판로가 개척되어야 한다.


“그래서 협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농촌 정착을 위해 농축산복합영농을 실현하여 자립농가를 형성하면 규모의 곡물농업과 축산농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웃 중국 조선족의 농업과 결합하여 농장을 꾸리고 중국 농산물의 수입과 유통네트워크를 이용하면 도움이 된다는 것.


이를 위해 한국의 자본, 중국 조선족의 기술, 북한 노동자를 결합하면 좋은 농업 모델을 구현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마침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열린 장은 한국의 5일장처럼 거대하진 않았지만 소소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곤 해서 유통의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저기 광대한 광야가 보이시죠?”


문화센터를 나와 광야 한 가운데 있는 발해 예 성터에 올라갔을 때 김연동이 안내했다. 사방을 바라보니 탁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낙원이 따로 없다. 만주벌판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토이자 항일 독립운동지의 핵심지가 이처럼 광활하다니.


▲우수리스크 주변 광야(발해 옛 성터)



우정마을


우수리스크에서 차로 20분 거리를 달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우정마을'이다. 우정이 연상돼서인지 처음 방문인데도 왠지 정이 느껴진다.


“와, 아주 한국 시골이구만.”


전원채 회장이 시골 출신 티를 냈다.


집이며 길이며 막 정비 작업을 마친 듯한 한국의 여느 고향마을이다.


질서정연한 벽돌기와집 마을이 눈앞으로 들어왔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머리에 삿갓을 쓴 지하대장군과 비녀를 꽂은 지하여장군 등 나무장승이 우리 민족의 마을임을 말해준다. 러시아 땅에서 보는 동방의 이색적인 풍경이다. 2000년부터 1000채를 목적으로 조성한 마을은 한국이 IMF를 당하면서 겨우 30여 호 정도 정착하게 되었다.


마을의 문화회관 앞에 멈추었다. 현판에는 ‘문화마당 솔빈’이라고 씌어 있다.


“솔빈은 러시아 말도, 우리말도 아닌 것 같은데?”


“이 고장이 발해 솔빈부였던 지역이지요.”


갑자기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다.


“이름이 참 좋은데요.”


우정마을 내의 문화마당 솔빈에 짐들을 내리고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사공박의 기분은 옛 발해에 도착한 듯 묘했다. 마치 천년세월이 순간으로 좁혀지면서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의 넓은 지역을 아울러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은 흥분에 마음이 괜히 들뜬다.


“발해는 고구려의 맥을 가장 잘 이은 나라로 다민족 공동체였지요. 발해의 정신은 오늘날 극동 평화와 공동체사상의 기반이 아닐까요.”


극동평화연대가 추구하는 사상과 같다는 김연동 대표의 설명이다.


시골 친척집에 온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오늘의 우정마을을 현장에서 일구어낸 꾸밈없고 순박한 마을 사람들의 웃음이 여행의 피곤함을 씻어준다.


우정마을은 1998년 대한주택건설협회가 세운 것을 2004년에 극동평화연대가 이어받아 꾸준히 공들여 만들어온 '고려인 정착촌'이다. 33개의 가옥에 고려인이 27가구, 러시아인 3가구, 그리고 한국인 2가구였다. 집집마다 무공해 채소를 재배하고 있는 비닐하우스와 청국장 제조 공간이 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이 우정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 되어 있다.


이 마을에 들어와 정착해 살고 있는 고려인들.
몇 대째 이역만리에서 생활을 하며 고려인임에도 우리말 대신 러시아말이 더 유창한 사람들.
그들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까.


▲마을회관 격인 ‘문화마당 솔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