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혈압이 사라졌네

혈압이 사라졌네

오선닥 2012. 7. 24. 15:28

한 젊은이가 대학병원으로 실려갔다.

그의 이름은 오선덕.

주인공 송대길은 어디 갔나?

아니, 간 게 아니고 오선덕으로 변신한 것.

왜?

그동안 송대길 이름이 너무 알려져 식상한 탓도 있지만

커다란 위기에서 구사 회생한 것을 기념해

새 이름 吳善德(Oceandoc)으로 바꾼 것.

생사의 경계가

너무나 얇다는 것을 터득하고 …….

 

 

 

 

혈압이 사라졌네

 

 

젊은이는 새벽 4시 아파트에서 구급차에 실려 나갔다. 구급차의 속력에 놀라 새벽하늘의 별조차 옆으로 비켜섰다.

 

C 대학병원 응급실은 막 구급차 뒤꽁무니에서 뽑아낸 환자 때문에 갑자기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들것에 실려 침대로 옮겨진 몸뚱어리는 점점 생명을 소진하고 있었고, 하얗게 퇴색돼 가는 얼굴빛은 응급실 의료진을 바짝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당직 의사는 한눈에 가망이라는 용어가 적용될 수 없는 환자라고 생각했다. 환자의 상태는 낭떠러지 앞에 걸려 있는 절망의 아슬아슬한 모습 그 자체다. 전공의(專攻醫) 3년차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조금이나마 충실해지는 것이라고 여길 뿐이다.

 

청진기에 잡히는 맥박은 너무 희미하고, 뻘떡이는 횟수가 카운트되지 않는다. 환자의 얼굴은 백지로 변하고 있다.

 

A4 용지만큼이나 하얗게.

 

“오선덕 씨, 들립니까? 들리면 눈을 껌벅거려 보세요.”

 

의사의 절박한 언어가 오선덕의 귀에 희미한 음성으로 닿았다. 그는 눈을 몇 번 껌벅거리긴 했으나 몸은 침대에 달라붙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생명의 위협을 목격한 의사는 수혈을 서둘렀다. 그러나 몸속의 상태를 모르고 무작정 피를 넣을 수는 없다. 일단은 몸속의 쓰레기를 뽑아내고 지혈을 해야 한다.

 

환자가 생명줄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의사는 간호사에게 호스 두 개를 준비시켰다.

 

호스 A: 식도용

호스 B: 항문용

 

환자를 약간 옆으로 눕히고 호스 하나를 환자의 입에 집어넣는다. 식도를 따라 천천히 밀어 넣는다. 그러곤 몸속의 쓰레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쓰레기와 오물을 흥건하게 덮은 시퍼런 피가 세숫대야에 쏟아졌다. 다른 호스 하나가 간호사의 손을 빌려 항문으로 넣어졌다. 쉴 새 없이 피가 쏟아졌다. 아래위로 홍수처럼.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를 씻어내어 새 사람으로 거듭나라”고 힘주어 말한 주일예배 목사의 설교가 “속의 온갖 오물을 씻어내어 새 생명을 찾으라”로 해석될 판이다.

 

환자는 점점 심한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피가 탕진되어 그의 몸에는 혈액 대신 고통이 돌고 있었다. ‘죽는 게 이런 거구나!’ 고통만 없다면 이렇게 죽어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또 한 사람이 반죽음이 되어 가고 있는 상황을 지나칠 수 없다. 여인은 새파랗게 변해갔다. 환자의 남아 있는 의식은 여인만큼은 기절하면 안 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유언은 한가한 사람이 하는 거로구나.”

 

유언을 남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통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마지막 가족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 몸부림은 그가 아직 책임감 있는 착한 가장임을 증명해 보이려는 노력 같기도 하다.

 

아홉 미터의 내장에서 나오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여분의 세숫대야가 필요했다.

 

“피가 너무 많이 쏟아지는데!? 혈압을 계속 체크해 봐요.”

 

간호사를 보채는 의사의 당황하는 표정이 응급실 분위기를 더 절박함으로 몰고 갔다.

혈압을 체크하는 간호사의 동공이 갑자기 몇배로 확장되는 순간.

 

“선생님, 혈압이 사라졌어요!”

 

“뭐?”

 

의사의 귀에는 생명이 사라졌다는 말로 들렸다. 있었던 것이 없어졌다는 것은 절망을 의미한다. 지금 의사의 임무는 없어진 것을 있었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다.

 

“지혈제 준비하고, 수혈팩 빨리 가져와요.”

 

의료진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생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자는 엄습하는 고통에 오만 상을 찌푸렸다.

 

사람 몸에 피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의사는 세숫대야를 목도하고 처음으로 실감했다. 의사는 왜 자기 당직시간에 이런 절박한 환자를 만나게 됐는지 신에게 원망하고 싶었다.

 

“집에서 출혈을 너무 많이 했었군요.”

 

그렇다.

 

새벽녘에 속이 메슥거려 오선덕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뱃속에서 신물의 솟구침과 함께 울컥거림이 있었다. 변기에 앉았을 때 화장실 바닥에 구토를 했고, 몸 아래를 통해 변기 안에도 쏟았다. 모두가 시커먼 색깔이었다. 머리가 핑 돌고 의식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화장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아이 대신에 여인이 달려 나왔다. 세상에서 쇼크에 가장 민감한 사람이 달려와서 가장 쇼킹한 장면을 목격했다. 미식한 냄새가 여인의 코를 찔렀고, 화장실 바닥은 붉은 선혈로 꽉 찼다.

 

선혈!

 

의식을 잃어가던 환자의 눈에는 그 피가 시커먼 즙물로만 보였을 따름이다.

 

여인이 기절하지 않고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자신과 환자가 동시에 죽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구급차를 부를 수 있었다.

 

전날 저녁 특별히 잘못 먹은 게 없다. 의사는 위 내부 모세관이 터져 급성으로 출혈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잠정적 진단을 내렸다. 어디까지나 추정이고 정확한 진단은 담당 과장이 주제하는 진료회의에서 내려진다고 했다.

 

집에서 병원까지 일 킬로의 짧은 거리를 오는 동안 여인은 온갖 생각이 들었다. 바이블에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고 긍휼히 여기라고 기록한 것이 자신에게 적용되는 게 아닌지, 두려움까지 파고들었다.

 

 

 

 

“혈액응고 여부는 나중에 체크하고, 일단 수혈을 시작합시다. 환자의 생명이 급하니까요.”

 

장세척이 거의 끝날 무렵 의료진의 결정에 따라 수혈이 시작됐다.

피를 주입한다기보다 부어넣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피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평화와 안식의 의미가 뭔지를 환자는 처음으로 알게 된 표정이다. ‘생각하기’를 좋아했다는 데카르트 아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환자는 “나에게는 피가 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를 부르짖고 싶은 심정이다.

 

“혈압이 살아나고 있어요!”

 

사람이 살아나는 것보다 혈압이 살아난 것에 간호사는 더 기뻐하는 것 같다.

살아있는 사람의 피가 바닥난 것은 처음 경험한다고 의료진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다.

 

“혹시 헌혈증서 갖고 계셔요? 혈액 구입이 쉬울 텐데…….”

 

혈액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아 의사는 보호자에게 확인해 본 것이다. 그러나 오랜 해상생활로 헌혈의 기회도 적었지만 헌혈의 중요성을 별로 느껴보지 못한 환자였으니 헌혈 기록이 없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어렵게 마련된 혈액으로 수혈은 계속됐다. A형의 피가 모자라 O형으로 바꾸어 수혈했으나, 헌혈 한번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런 생명의 피를 주다니, 보호자는 무슨 죄를 지은 것처럼 감사하면서도 미안해했다.

 

기다렸던 담당 과장의 회진 시간.

 

“정말 큰 일 날 뻔했군요. ‘급성출혈성십이지장궤양’입니다. 이렇게 피를 많이 쏟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일단 지혈이 된듯하니 수혈을 계속하시지요.”

 

소대병력의 의료진을 끌고 다니는 과장의 지시는 힘이 실리는 듯하다. 입술이 얇고 다부져 마치 160센티의 키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는 처칠 수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독일어 합성어처럼 긴 병명이 침대에 붙었다.

 

<급성출혈성십이지장궤양>

 

병명에 대한 의사의 설명은 만담가의 긴 이야기처럼 정리됐다.

 

내장이 헐어버리면 통증의 신호가 올 텐데 그런 게 없었다. 핏줄만 온통 건드려놓고 아픔은 숨어버렸다. 쏟은 피가 내장에 가득 찰 때까지 신호를 주지 않은 것이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듯 같은 병이라도 나타나는 결과가 다르다. 예컨대 구멍이 뻥 뚫려 통증이 있는가 하면, 오선덕의 경우처럼 핏줄만 할퀴고 통증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

 

담당 과장의 릴레이식 질문이 시작된다.

 

“근래 다른 질병으로 병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나요?”

 

“한 달 전에 이 병원에서 안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과장은 인턴에게 안과 진료카드를 뽑아오도록 하고는 질문을 이어나간다.

 

“담배는 태우고요?”

 

“하루에 반 갑 정도 피웁니다.”

 

태우느냐는 질문에 피운다는 대답을 해도 의사는 개의치 않았다.

 

“담배를 끊는 게 좋겠네요. 담배는 T세포를 죽일 뿐만 아니라…….”

 

‘요’자로 말 끝내기를 좋아하는 과장은 이번엔, 크게 입맛을 다셨다.

 

“담배 연기 속에는 4800가지 화학물질이 포함돼 있어요. 이것들이 백혈구와 적혈구를 파괴한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그런 것까지 환자가 어떻게 알아.

과장은 구체적 설명을 가하지 않고는 못 벼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핏속엔 백혈구와 적혈구가 있는데, 백혈구는 침입자 병균을 자기 가슴으로 끌어안아 녹여버리지요. 적혈구는 골수에서 태어나 폐의 산소를 받아서 자기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사람 몸의 모든 기관에 공급하고 자기는 비장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지요. 이렇게 유익한 것을 사람들이 담배를 태워…….”

 

동화구연처럼 설명해 나가는 중 인턴이 안과 진료카드를 가져오자, 과장은 ‘유익한 면역체를 망가뜨린다’는 끝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진료카드에는 눈의 핏줄을 걷어내는 시술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소염제를 쓰셨군요. 스테로이드 성분이 혈액 응고를 방해하는 데 일정 부분 작용한 것 같네요……. 한 달간 복용한 기록이 있구요.”

 

또 질문.

 

“평소 뚜렷한 병변(病變)이 없었다 하더라도, 조금 다른 징후가 있었다면?”

 

“몇 년 전 해상생활 할 때 간혹 검은 변을 목격하곤 했습니다.”

 

‘승선생활’ 대신 ‘해상생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오선덕은 해운 전공자답게 용어 선택을 잘했다고 자부하는 사람같이 보였다.

 

한편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의사는 자기의 질문이 학계를 경악시킬 만한 의학적 이론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자신하는 사람 같았다.

 

“스트레스 같은 것 받은 적은 없었나요?”

 

“항상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가족 생각에…….”

 

“그건 그리움인데, 그리움은 엔도르핀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한번씩 엉뚱한 데가 있는 오선덕.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면……요?”

 

“부인 앞에서 그런 농담을 하면 되나요? 고통이 좀 사라지니 이젠 여유가 생겼나 보군요.”

 

웃음 뒤 진지한 대답으로 돌아온다.

 

“입출항시 긴장하고 밤샘하다 보면 피곤이 쌓이곤 합니다.”

 

“그렇겠지요. 옛날 해상생활은 그렇다 치고……. 최근 육상 업무에 관한 스트레스는 없었나요?”

 

“영업하는 사람이 업무 스트레스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1984년은 해운불황으로 해운계가 젖 담은 해라고 하겠다. 스펀지처럼 불황은 야금야금 해운시장을 무기력으로 적셔나갔다.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해운회사가 점점 늘어났다.

 

오선덕이 이끄는 부서의 영업실적은 좋았으나 불황 시장의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부서원은 파죽음이 되어 갔다. 부장 자신은 확실히 무리수를 뒀다. 롱런으로 가야 하는데 초반에 힘을 너무 쏟아 넣었다. 그러니 스트레스가 없다곤 할 수 없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는 것 아시죠? 특히 소화기 계통에는…….”

 

바쁜 회진 시간에 이렇게 길게 환자와 상담을 해본 적이 없는 과장은 이번 케이스는 학계에 보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선덕 씨, 다행히 출혈이 멈춰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네요. 하루 이틀 더 경과를 지켜보고 수술 여부를 판단합시다. 수술 여부와 관계없이 아마 열흘 정도는 입원해야 할 거요. 일 생각하지 말고 음식 조심하고 마음 편하게 쉬세요. 때로는 드라마 같은 것도 보면서…….”

 

팔자 좋게 드라마나 보고 있으면 두 달간의 일본 연수에 투자한 거금은 어떻게 회수하나.

 

피를 탕진해버린 환자는 결국 여덟 봉지의 수혈을 받은 후 영양제 링거를 맞기 시작했다.

 

 

 

 

입원 이튿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부서의 권솔 네 명이 병문안 왔다.

그들의 방문에서 환자는 자신이 분명히 살아있다는 걸 확인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이 사람들이 조문객으로 바뀔 뻔한 일을 생각하면 새삼 산다는 것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윤중호 과장이 자몽 상자를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환자는 살아있는 사람이 가져온 물건을 쳐다보았고, 그것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이 먹는 과일이었다.

 

“이 비싼 수입과일을? ”

 

그러곤,

 

“……하긴, 내가 먹지 못하는 줄 알고 사 왔었겠지?”

 

뉘앙스가 애매한 농담이었다.

같이 온 김사랑 계장이 여성다운 애교를 부린다.

 

“부장님, 이건 저희들의 진심어린 성의예요. 그렇지만 저희들도 먹게 해주세요.”

 

애교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 그녀였다.

환자는 자몽에 대한 상식을 앞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자몽은 안 먹어본 사람은 쓰서 못 먹어요. 내가 완쾌될 때까지 보관해 두었다가 먹을 테니 그대로 둬도 괜찮아요.”

 

그러나 자몽 박스는 풀렸고, 졸지에 부서 회식이 벌어졌다.

박수진 양은 기다렸다는 듯 미국산 별미에 열을 올렸다.

이서구 대리는 분위기 파악이 형광등이라,

 

“이런 행동이 환자의 위로에 도움이 됩니까?”

 

정색을 했으나 윤중호 과장이 웃어넘겨 어색한 분위기는 해소됐다. 환자가 열흘 정도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윤 과장은 부(副) 책임자로서 위치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부장님, 회사 일은 저희들한테 맡겨두시고 치료에만 신경 쓰셔요.”

 

윤 과장은 병실로 일거리를 가져오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정리하기 어려운 일들이 사무실에 늘려 있다. 차항(次航) 운송선으로 지정된 배가 일본연안 항해 중 충돌해 긴급히 수리 조선소로 들어가야만 하는 것은 비상상황에 속한다. 일본 본사의 광탄선 과장은 선적지 호주로 보낼 대체선을 찾아야 한다고 야밤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전화할 정도였다.

 

평소 몇 척의 한국 선박을 체크해 놓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 중 대만에서 곧 하역이 끝나는 배가 가장 먼저 대상에 올랐다. 윤 과장이 선주에게 전화했을 때 가능성의 불빛이 보였다.

 

오 부장은 그 배의 상태가 궁금했다.

 

“호주 석탄 운송은 잘되고 있겠지, 윤 과장?”

 

부장은 꿈속에서도 일만 생각하나? 윤 과장은 그렇게 혼자 말을 하면서도 부장 덕분에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감사했다.

 

생사기로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환자의 소식을 듣고 걸대 좋은 한 친구가 부인을 대동해서 면회를 왔다. 링거를 꽂고 있는 환자를 보고, “이렇게 병실에서만 있을 사람이 아닌데, 우리 산책이나 나가자” 하면서 병원 정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지난여름 태풍에 반쯤 기울어진 큰 나무 밑으로 간 것은 환자를 약간 불안하게 했다. 마지막 잎새라든지, 쓰러진 나무는 흔히 불길한 전조로 표현되는 소설의 장면 같아서.

 

친구는 은근히 의미 있는 장소임을 강조한다.

 

“집사람이 처녀 때 맹장염에 걸려 이 병원에 입원했었지. 그때 우린 이 나무 밑에서 데이트했었고……. 정말 이곳은 추억이 스며있는 곳이야.”

 

 “그랬었군. 너희 부부는 지금도 청춘이야. 오늘 내 문병 온 게 아니고 데이트하러 왔군.”

 

그러면서 환자는 휠체어를 약간 앞으로 굴리며 그들만의 자리를 위해 비켜주는 시늉을 했다. 친구가 조언하기를 참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는 또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업한답시고 술 마시고, 담배 태우고, 여자 밝~히~고. 아냐, 마지막 것은 아냐. 좌우지간 니 체질이 어떻게 버텨 내냐? 이젠 일보다 몸을 생각하라구.”

 

이 친구도 일보다 몸을 생각하라고 하네. 사람들은 오선덕을 일중독자로 매도해 버리는군. 친구 부인이 가만있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오 부장님, 정말 그래요. 무엇보다 몸을 생각하셔야 돼요.”

 

그녀가 말하는 ‘무엇보다’는 술, 담배, 여자, 일을 모두를 포함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자 혹은 일만 포함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오선덕은 끊을 만한 것은 다 끊어야 하는 상황이다.

 

‘끊을 대상에서 혈관은 포함되지 않음을 명심하라.’

 

도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환자는 응급실에서 2인실 병실로 옮겨졌다. 업무협의 등을 고려해 사장이 특별히 병원 측에 부탁한 결과이다.

 

맞은편 침대에는 영화기획사 대표가 맹장염 수술로 하루 전부터 입원해 있었다.

 

요즘 맹장염 수술은 수술 축에도 안 끼인다고 하는데, 문병 오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때문에 2인실이 6인실보다도 더 북적거렸다. 병실 분위기는 사장의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맹장 환자와 통성명했다. 두 사람은 화창한 봄날에 젊은이로서 이렇게 침대 신세를 져서 되겠느냐를 두고 공감대를 형성했고, 처량한 상황을 서로 위로하기로 했다. 다양한 직업의 존재에 대해 흥미 있는 대화가 진행되는 중에 바깥에서 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최근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코미디언이 연예인 부인을 동반하고 병실에 들어섰다.

 

“먹는 것은 무거워서…… 이것만 들고 왔네. 받어, 친구야!”

 

코미디언은 봉투 하나를 맹장 환자에게 내 밀었다.

넉살맞게 그 자리에서 봉투를 뜯어보는 환자.

 

“아니, 아무것도 없잖아?”

 

“밝히기는……. 봉투와 속지 사이를 잘 살펴보라구!”

 

속지 사이 깊숙이 박힌 수표 한 장을 꺼내는 환자.

 

“바로 상납하면 덧나나. 항상 이렇게 애를 먹인다니까.”

 

맹장 환자의 기분 좋은 표정. 그러면서 옆의 침대 환자 오선덕을 쳐다보며 웃는다.

코미디언은 입이 간질거리는 모양. 결국,

 

“형씨는 어디가 고장 나서 입원하셨나요?”

 

초면에 무례한 질문 같기도 하나 화자는 코미디언 아닌가.

오선덕은 평상심의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십이지장궤양입니다.”

 

‘급성출혈성’이라는 앞 단어는 빼버리고 말했다.

코미디언은 자기 방식대로 말하는 습관이 또 드러났다.

 

“우린 속 터질 일 하지 맙시다. 이 침대는 십이지장, 저 침대는 맹장. ……말하는 이 사람은 복장……터지고.”

 

무례를 책하기는커녕, 모두가 웃음을 참지 못해 뭔가 또 터질 지경이다.

맹장 환자는 배를 꾹 누르고 참으면서,

 

“너, 정말, 봉합 실 터지게 만들 거야? 수술 두 번 하기 전에 나, 나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코미디언의 부인이 결국 남편의 농담을 가로 막으면서 옆의 환자에게 폐 끼치지 말 것을 눈치 주었다.

 

그러나 코미디언은 그칠 줄 모른다.

 

“환자분들, 욕심 버리세요. 특히 일 욕심…….”

 

두 환자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하는 것이 오선덕에게도 해당된다는 뜻이다.

코미디언의 말은 유머인지 조언인지 도통 구분이 힘들지만, 그의 습관은 계속됐다.

 

“일 떨쳐버리고 코미디 프로 자주 보세요. 건강에 좋습니다.”

 

이번엔 맹장 환자가 가만있지를 못하고,

 

“바보상자 TV만 보라구? 그래 금일봉 받았으니 네가 나오는 프로 한번쯤은 봐주겠다.”

 

코미디언은 이번엔 오선덕을 향했다.

 

“맹장 환자의 가장 큰 고통이 뭔지 아십니까? 부부격리입니다. 맹장수술은 나이롱환자와 다름없어요. 실밥도 뽑기 전에 산책 나간다 하면서 부근 모텔로 간다니까요. 그런데 저 친구는 그런 능력도 없을 걸요. 눈치가 빵점이라서…….”

 

그리고 맹장 친구를 향해,

 

“그래가지고 영화기획은 어떻게 해?” 공격했다.

 

이 대목에서 맹장 환자도 지지 않는다.

 

“눈치로 영화 하냐? 영화는 삶의 그림자라구.”

 

“하긴 흥행과 반대로 가는 네 영화는 작품상이나 받어.“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지 못하는 네가 금일봉을 내놓다니, 요즘 인생관이 바뀌었나부다.”

 

“길게 바라지 마! 영화기획사에 미리 던져놓는 약밥이야.”

 

“코미디 영화 기획할 때 참조할게.”

 

약간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온 코미디언.

 

“여기 누워있는 거 후회 안 해?”

 

“천만에. 너희 부부가 찾아오니 영광이야. 참 제수씨 감사해요!”

 

연예인 부인은 웃음만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코미디언은 병실을 나가기 전에 맹장 친구에게 건강에 대해 한마디 했다.

 

“앞으로 시들한 시금치처럼 되지 말고, 소금 뿌린 미역처럼 팔팔해져 봐. 알겠지?”

 

“인생에서 십전대보탕같이 힘을 불어넣어 주는군. 고맙다.”

 

맹장 환자의 봉합 실이 터지는 사고는 없었다.

 

코미디언은 “내일 다시 와서 괴롭힐 시간을 가질 거야” 하면서 병실을 나갔다. 오선덕에게 “떠들어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은 것은 예의가 어떤 때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 같았다.

 

 

 

 

오선덕은 김치가 무척 먹고 싶었다. 죽만 먹으니 죽을 맛이다. 그는 맹장 환자가 수술 사흘 만에 김치를 먹는 걸 보고 너무 부러워했다. 세상에 부러운 것은 아주 사소한 데 있음을 처음으로 깨닫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행복은 멀리, 큰 것에만 있지 않다’

 

딸랑 김치 한 조각에서 터득한 진리치고는 너무 유치했다.

 

수술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흘 동안 꼼짝 없이 침대 신세를 졌다.

헐어진 내장의 자국은 새살로 채워졌음을 내시경이 확인해줬다. 미안하게도 암포젤을 발명한 사람을 하루 세 번씩 원망했다. 위를 코팅해 위산을 제거하기 위해 꼭 이런 느끼한 알루미늄 뜨물을 먹어야 하는지.

 

열흘간 입원하는 중 병원 바깥세상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충격으로 반죽음에서 살아난 것은 이 글의 초반에서 언급했고.

 

김사랑 계장의 약혼 축하 파티가 무교동에서 열렸다.

 

그날 파티 과정을 그녀는 약혼자와 함께 병실을 찾아와서 부장에게 간단히 보고했다. 약혼자가 프로야구 OB베어스의 열렬 팬이기 때문에 OB베어스 간이술집에서 약혼 파티를 가졌고, 결혼하자마자 첫 타석에서 ‘아들’ 홈런을 날리겠다고 그가 선포했다는 사실도 과감 없이 전해줬다.

 

“소맥파티를 열었고요, 폭탄주는 하지 않았어요. 부장님 퇴원하시면 폭탄주로 축하해주세요.”

 

김사랑의 정의에 따르면, 소맥은 맥주에 소주를 탄 것이고, 폭탄주는 맥주에 위스키 잔을 넣은 것이라나. 아무리 영업부 직원이라 하지만 여자가 술에 대한 조예가 너무 깊으면 안 되는데.

 

상무와 전무가 찾아 와서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앞으로 오 부장한테는 술 권하지 않을게.”

 

그러면서 자기들은 어디까지나 생명을 중시하는 사람임을 강조했다.

 

동료 부장들도 찾아왔다. 한결같이 “앞으로 술친구 한 명 놓치게 돼서 섭섭하네” 하면서 동일한 멘트를 하기로 작정한 사람들같이 보였다.

 

사장이 두 번째 문병 왔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 번 방문 때 오 부장의 아내가 남편의 건강에 대해 너무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 걱정의 내용 속에는, 남편은 영업 묵기가 아니며, 퇴원 후 적어도 3개월의 요양이 필요하고, 그것은 결국 휴직이나 퇴사가 자연스럽지 않느냐는 의견이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사장은 그를 특별히 병원 테라스로 데리고 갔다.

입원 후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던 담배를 권한 사람은 사장이었다.

오선덕은 영업활동에서 종종 담배가 분위기 전환용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장님이 권하신 이 담배를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금연하렵니다.”

 

사장이 라이터를 켜려고 하는 것을 오선덕이 받아서 사장의 담배에 먼저 불을 붙이고, 그리고 그의 것으로 불을 가져갔다.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빤 사장.

 

“그래야겠지. 아무래도 건강을 챙겨야 하니까.”

 

“……”

 

테라스에는 다른 환자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한결같이 라디오를 들고 나온 것은 심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인가.

 

한 청년 환자의 라디오에서는 프로야구 해설위원이 무척 흥분했다. OB베어스의 김우열 선수가 홈런을 쳤고, 현재 홈런 수에서 김봉연 선수를 앞선다는 것. 한 젊은 여성 환자의 라디오에서는 글래머 가수 박경희가 출연해 김기웅 작곡의 ‘비둘기 집’을 불러 연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다는 것.

 

사장은 환자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그동안 너무 과로했어. 당분간 회사 일은 걱정 말고 요양을 충분히 하게나.”

 

‘당분간’이라는 용어에서 ‘퇴사’는 고려 사항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 스며있었다.

 

“연수 갔다 와서 잘 해보려고 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직원 다섯 명의 부서로 키워 놓았으니 고마워. 요양기간은 유급휴가로 할 테니 딴 생각 말고…….”

 

치료비는 회사비용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직원복지규정에 그런 조항이 없으니 결국 사장 자신이 해결했을 것이다.

 

환자는 일단 3개월간 요양하기로 했다.

 

 

 

"아직도 암포젤을 먹고 있어?”

 

요양 중 어느 날, 오선덕이 사장실을 찾았을 때 사장의 첫 질문이었다.

알루미늄 색깔에 대한 거부 반응이 오 부장에게 있다는 걸 사장은 이미 알고 대화가 그렇게 시작됐다. 오선덕은 암포젤의 ‘암’자마저 느끼하게 느낄 정도다.

 

“적어도 90일은 먹어야 한답니다. 의사는 세상에 먹기 좋고 달짝지근한 약이 어디 있냐고 막무가냅니다.”

 

3개월보다는 90일이 더 길어 보였을까.

 

사장은 탁자 위에 두툼한 보자기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풀었다. 그것은 오선덕이 2년 전 일본에서 작성했던 일본연수 리포트였다.

 

“앗!?”

 

오선덕은 속 깊이 파고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확실히 사장은 자신보다 한수 위라는 걸 순간적으로 인정했다. 심증에서 머물어 있던 상황을 물증으로 결론지어 버린 소송 건처럼 보였다. 사장은 부장의 회심(回心)을 바랐고, 부장은 사표(辭表) 언급의 기회를 찾고 있었던 싸움에서 사장이 승리한 것이다.

 

‘할일이 산더민데 감히 사표를?’ 사장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날은 끝내 ‘사표’의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고 오선덕은 사장실을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3개월 유급휴가는 양심이 허락지 않아 마침내 오 부장은 사표를 제출했다.

 

부서라는 건물의 골조를 세워놓고 내부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함이 얼마동안 양심의 꼬리를 물고 다녔다.

 

나중의 일이지만, 십이지궤양이라는 놈은 이후 3, 4년 주기로 재발해 오선덕을 도합 네 번 입원시켰다. 그때마다 병원이 달랐고, 대충 열흘씩 병원 신세를 졌다. 이쯤 되면 궤양과 오선덕은 신토불이 사이쯤 된다고 봐야 한다.

 

헬리코박터균의 특효약이 언제 발명되었는지 오선덕만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디어 암포젤을 먹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거의 숙명적일 뻔했던 골치 질병이 완쾌되었으니까(1982년 헬리코박터균이 발견된 후 특효약이 한국에서 사용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대략 10년 후).

 

병원 신세를 무조건 손해 보는 장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을 이해한 것은 하나의 소득이었다. 재벌 총수들이 종종 업무와 휴식을 구분하기 위해 입원을 선택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 휴식은 인간의 몸을 혹사하는 폭군으로부터 격리시키는 효과가 있다 -

 

이후 상황 전개는 다음 소설의 몫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