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운영업 뛰어들다

해운영업에 뛰어들다

오선닥 2012. 4. 26. 14:38

 박 대통령 시해 후 새로운 별들이

권력을 잡은 지 석 달도 채 안 된 1980년 정월

송대길이 상경을 감행했다.

권력에 빌붙자가 아니라 해운영업을 찾아서.

부정기선 영업을 시작하는데……

 

 

 

 

해운영업에 뛰어들다

 

 

부산 갈매기는 바다 위를 날도록 놔두고 송대길은 권솔을 데리고 서울로 북진했다. 꿈을 한껏 펼쳐보겠다는 각오는 망치로도 깨어지지 않을 듯싶다.

 

박 대통령 시해 후 새로운 별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1980년 정월에 왜 상경했는가. 이유는 궁하지만 바다가 아닌 육지에서 배와 관련된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치의 긴장 같은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단지 낯선 도시에서 꿈을 살려나가는 데 마음의 긴장이 풀릴까봐 걱정일 뿐이다.

 

서울 시청에서 멀지 않은 건물에 비즈니스 가방을 내려놓았다. 더디어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일본 대형해운사 중 하나인 K사가 그를 쓰겠다고 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영업을 하려면 우선 술에 강해야 돼.”

 

입사 사흘째쯤 사장은 송대길을 불러 직무 우선순위를 내비쳤다. 술이 영업 성과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고 했다. 술 상무가 아닌 술 부장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라고 부언했다.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듯 사장은 무교동의 한 작은 막걸리 집으로 그를 데려갔고, 난타가 악기로 쓸 만한 양철 테이블 위에 빈대떡 안주를 주문해서 올려놓았다.

 

“실망하지 마. 술은 이런 데서 시작하는 거여.”

 

해운계에서 말술로 유명한 그가 송대길에게 한 수 가르치는 시간이 시작됐다. 적어도 해운영업은 술을 빼고는 논의될 수 없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띠 동갑 선배요, 역시 선장 출신으로서 마도로스의 세계를 잘 안다. 위스키 병을 비스듬히 잡고 담배 파이프를 옆으로 물고 허리를 45도쯤 난간에 걸쳐 놓으면 건사한 마도로스 자세가 잡히는 것도 알고 있다. 배우 박노식이 그 모습을 잘 만들어냈지만.

 

“회사를 무교동 지역에 자리 잡은 것은 영업 때문입니까?”

 

송대길은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은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지긋한 웃음을 보이며 이야기를 늘였다.

 

“손님 접대는 고급으로 하더라도 식구끼리는 이런 데가 마음이 편해. 무교동은 역시 술맛이 나는 곳이여. 이 부근에 해운회사들이 많은 이유를 차츰 알게 될 거여.”

 

막걸리 한잔을 버럭 들이키고 빈잔을 신입 부장에게 들이미는 사장.

그의 취향은 주관대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우린 뱃놈 출신이니까 술과 싸워 져서는 안 되겠지. 내가 회사를 만드는데 술 덕을 많이 봤어. 이 바닥에서 내 술 안 얻어먹은 사람 몇이나 되나 보라구. 내 술 인맥은 거미줄이여. 술기운이 끊어져 그 친구들 다 떨어져 나가도 난 상관없어. 새로운 술친구를 만들면 되니까.”

 

송대길의 계산이 점점 헷갈린다. 전문실력으로 승부하려고 했는데 술로 승부하라는 것 같이 들려서. 보아하니 사장은 앞으로 술을 많이 강조할 것 같다.

 

회사가 송 선장을 채용한 이유는 그의 특이한 업무 스타일 때문이라고 전해졌다. 돌출적이고 틀을 깨는 짓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부정기선부를 새로 개설하는 사장으로선 이런 놈 하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이익 내겠다는 욕심은 버려. 신설부서인 만큼 기반 구축이 중요하니까. 장기적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잘 세워보라구.”

 

“사장님께서 잘 이끌어주십시오.”

 

모처럼 말할 기회를 얻은 송대길은 갑자기 부담감이 어깨를 눌렀다. 작은 술자리지만 사장의 비전이 워낙 커서 실망에 대한 대처방법부터 찾아야 할 형편이다.

풍선이 크면 쪼그라드는 정도가 커지는 법.

 

신설 부서의 초대 부서장이 된 것은 파격적이지만 반면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차장 직급으로서 부서장을 맡은 만큼 영업성과를 내지 못하면 정식 부장으로 승진은 보장되지 않는다.

 

 

사장이 막걸리로 입사환영을 표시한 다음날 일본인 부사장이 스시 점심을 대접하면서 송대길의 입사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표시했다. 한국에는 다량의 벌크 화물이 해운시장에 나오지만 그 때마다 외부 중개업자를 이용해야만 했다. 이젠 회사 내 신설 부서를 통해 화물을 주선하면 편리하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정기선 영업만 하던 회사가 부정기선 영업부서를 만든 것은 회사 확장을 위한 야심이기도 하다.

회사는 과장 한 명과 여직원 한 명을 송대길에게 붙여주었다. 사장의 관심이 쏠린 부서인 만큼 정기선부에서 가장 유능한 여직원이라고 알려진 손주리를 차출해서 보냈다. 사흘 후 선박 대리점 업무를 담당하던 황도환 과장을 합류시켰다.

황 과장에게는 특별히 당부할 게 없을 것 같다. 꽤 침착하게 보이는 그는 소위 스카이(SKY) 대학 출신이다. 꼭 밝히자면 Y대학의 무역학과를 나왔다. 해상 실무경험이 많은 송 부장과 보완적으로 일하면 뭔가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이 보인다는 게 회사의 판단이다.

 

송 부장은 손주리가 최선으로 실력 발휘해줄 것을 바라면서,

 

“주리 씨 잘 부탁해요. 회사 입사는 주리 씨가 선배니까.”

 

호칭에서부터 신경을 썼다.

영업의 성격상 전화나 텔렉스 업무가 많으므로 여직원에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부장님, 부정기선 영업은 초자니까 잘 가르쳐 주세요.”

 

눈치도 빠르다. 차장 대신 부장 호칭을 쓰는 것부터 그렇다. 짧은 치마는 민첩하게 움직일 준비가 돼 있다는 표시 같기도 해서 송대길은 만족스러웠다.

 

“배에서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나 자신도 모르는 게 많아요. 좌우지간 서로 배워가면서 열심히 해봅시다.”

 

송대길은 부하에 대한 존댓말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잘 모른다. 업무적으로 친숙해지면 소속감을 핑계로 자연히 내려갈 것이다.

숙녀는 처음 대하는 상사와의 대화법을 아는 것 같이,

 

“사장님의 칭찬이 대단해요. 유능한 선장이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녀는 적당한 순간에 기분 좋은 말을 끼워 넣을 줄도 알았다.

글쎄, 이 숙녀가 사장으로부터 무슨 말을 들었을까. 기대치를 올려놓으면 나중에 수습하기 어렵다. 사장 같은 지휘관의 칭찬은 충성을 요구하는 하나의 전술일 수 있다. 칭찬의 값을 제대로 보상하지 못할 때 채찍은 짜고 매섭다.

 

어느 책은 이렇게 말하더라.

회사 근무에 있어서 능력이 성공이라는 신앙은 헛물이다. 충성심이 따르지 않는 능력은 회사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직장동료가 가족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자신의 입지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지녀야 한다는 것은 회사의 대외홍보용일 뿐이지 이를 착각하는 사람은 구조조정의 1순위다. 상사와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복을 만날 것이다.

 

괜히 불안을 주는 글은 읽지 말았어야 하는데.

 

회사의 규모는 자랑할 만하다.

해운수수료 수입 면에서 국내 세 번째 가는 대리점 합작회사이다.

백여 명의 직원이 정말 열심히 움직인다.

 

회사로 들어서는 입구는 스탠드바를 연상시키곤 한다. 일렬로 늘어선 스탠드는 비엘(B/L)을 발급 받느라고 항상 고객들로 붐빈다. 비엘 한 건에 육천원은 상당한 수입원이다. 그런데 초보 여직원은 비엘 한 건을 만들기 위해 카본지를 열 장도 더 소비한다. 구두점 하나 때문에 은행 네고(Negotiation)를 거부당하곤 하니. 컴퓨터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직원들이 이 단순작업에 동원되었는가. 컴퓨터는 이들을 단순노동에서 해방시켜준 훌륭한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손주리는 여성답지 않게 꿈이 단단하고 신설 부서에 대한 기대가 마냥 부풀어 있다. 그녀는 해운브로커가 영국에서 고급직종에 속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데, 이를테면 영국의 유명한 해운브로커 클락슨(Clarkson)에 입사하려면 최소한 10년의 해운실무경력을 보유해야 한다는 것 등.

 

26세의 나이는 결혼에 초연할 수 없으나 그녀는 일생을 바칠 만한 일을 해운에서 찾고 있었다. 업무의 진보는 계속되는 도전(Challenge)에 대한 성공적 응전(Response)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사흘 늦게 신설부서에 합류한 황도환 과장이 손주리의 책상 쪽으로 왔다.

 

“주리 씨 반갑습니다. 신임 부서장님이 주리 씨 실력을 알고 뽑으셨나 봐요.”

 

“저도 황과장님과 함께 일하게 돼서 반가워요. 환영합니다.”

 

황도환과 손주리는 서로 축하했다. 한눈에 봐도 둘은 자존감이 돋보이는 젊은이들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약 둘 사이에 티격태격이 끼어든다면 모름지기 이 자존감이 작용할 수도 있을 거라는 느낌이다.

 

황도환은 지금 선 자리가 지진에도 괜찮은가 확인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업무에 차질을 발견했다면 잠을 이루지 못할 책임감 많은 젊은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생활뿐만 아니라 일에 있어서 리듬이 뚜렷한, 거칠게 말하면 기복이 심한 송대길로서는 보완이 될 만한 귀중한 보조자들을 만난 셈이다.

황과 손의 기질은 앞으로 남성과 여성의 자리바꿈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미래학자는 아니지만 송대길의 직관은 그랬다. 같은 소금이라도 미역에 뿌리면 싱싱해지지만 배추에 뿌리면 시들어져 버린다. 소금의 역할은 그의 몫이다.

 

해운은 국제경쟁이다. 경쟁은 강한 쪽이 이기기 마련이어서 약한 자가 이기는 것은 도박에 가깝다. 그러나 도박에 행운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내쪽에서 잘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저편에서 이상한 패를 잡으면 행운이 나에게로 오는 법칙이다. 약한 자도 나의 고객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조직 편성을 다듬을 시간도 없이 부서는 일 속으로 뛰어들었다.

도전할 일은 이미 가시권에 많이 들어와 있다. 철광, 곡물, 목재, 소금 …….

 

 

 

* * * * *

 

부정기선부는 바쁘게 돌아갔다. 코스틸 화물 운송계약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덤으로 코파워와의 스팟마켓 화물도 여러 건이 계약되곤 했다. 전력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코파워의 전력용 석탄 수송량이 증가한 것이다. 자연히 부서는 바빠졌고 부서에서 창출하는 매출도 증가했다. 야간근무가 거의 일상화 되다시피 해 세 명은 피로에 쌓였고, 그러나 일의 흥미는 진진해져갔다.

 

매월 첫째 주에 열리는 간부회의는 그의 실력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영업보고를 할 때마다 힘이 생긴다. 부서의 신설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했었던 일부 중역도 적절한 시기에 부서 신설을 했다는 점에 동의하는 눈치다.

 

영업부서는 많은 수익을 올려야 하고 관리부서는 최대한 절약해야 하는 게 기업의 경영이치다. 신설부서의 급신장은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반면에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사내 조직 간의 협력에는 부정적이다. 담당 부서장의 고개 숙인 각도 크기를 보고 그 부서의 영업결과를 짐작할 수 있다.

 

회사가 조용하다싶더니 어느 날 임시간부회의가 개최되었다.

 

“영업전무의 주재 하에 미주영업과의 지난 번 리베이트 도박건의 관련자 징계 수위를 의논해서 결과를 보고해주기 바랍니다.”

 

사장의 엄명에 모두들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묵과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전무로서 사과드립니다. 곧 징계위원회를 열어서 보고드리겠습니다.”

 

…… 으흠”

 

주제를 던지고 나머지 회의 진행은 전무에게 일임한 후 사장은 회의실을 떠났다.

 

사건은 고객에게 주어야 할 리베이트를 사우나 휴게실에서 회사원끼리 도박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사건의 내용이 어떻게 사장의 귀에까지 들어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크게 돈을 잃은 직원이 의심을 받기 마련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영업실적이 좋으면 접대비의 증액이 허용된다. 접대비가 반드시 고객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부는 영업직원의 사기진작에 사용되기도 한다. 종합상사나 무역회사 직원과 만나서 정보 교환하는 것은 좋은 영업활동에 속한다. 커미션의 일정부분은 영업비로 할애해두는데 방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고객들의 리베이트 수령방법도 다양하여 L사는 부서 공동경비, D사는 부서장, H사는 개인 호주머니, S사는 일체 사양 등 각양각색이다.

 

리베이트가 때로는 회사의 비자금으로 쓰이는 것은 일반화된 현상이다. 해운의 특성상 중개인을 많이 거치기 때문에 커미션으로 얽히는 일은 많다. 선박매매, 용선중개, 화물주선, 벙커중개, 선박관리, 선원알선…. 뭐 하나 중개인이 개입되지 않는 곳이 없다. 재벌회사들이 한결같이 해운회사를 설립하려는 이유도 비자금 조성 매력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외국 거래가 많다보니 자금의 해외도피에 자주 이용된다.

 

며칠 동안 찾고 있던 화물이 하나 발견됐다.

텔렉스 자판을 두드리는 손주리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일이 빨리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아 야근을 준비해야 했다.

 

“오늘은 야근이 불가피하겠군. 황과장이 같이 있어줘요. H화학 공업용 소금 5만톤을 오늘 성약(Fix)해야 할 것 같으니까. 주리 씨는 퇴근하고요.”

 

그런데 손주리가 텔렉스를 잠시 멈추고 대신 입을 열었다.

 

“부장님, 오늘 황과장님은 먼저 퇴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부친 생신이어서 형제들이 다 모인다고 합니다. 대신 제가 야근할게요.”

 

황도환의 형편을 손주리가 꿰뚫고 있었다는 것은 소통이 잘된다는 뜻이고, 재빨리 그를 대변해주는 모습은 친화가 좋다는 뜻이다. 밉지 않은 분위기네.

 

“사정이 그렇다면 대신 매 맞을 수도 있지. 하지만 어머니께서 걱정 안 하시겠어, 주리 씨?”

 

“요즘 퇴근시간 늦는 걸 다 알고 계셔서 괜찮아요. 부서 홍보를 미리 해뒀어요.”

 

그랬었구나. 다시 한 번 그녀의 면밀함에 놀랐다.

개인사정을 직접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황 과장은 겸연쩍은 듯 왼손을 머리에 얹어 긁적거리려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장님.”

 

황 과장은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보험설계사처럼 가방을 앞세워 조용히 나갔다.

 

해운시장에서 한 건의 계약을 중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박의 위치와 화물의 흐름을 파악하고, 선주와 화주의 필요(Needs)를 꿰뚫고 있어야 하며, 중개인은 24시간 통신(Communication)이 가능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24시편의점이나 설렁탕집처럼 상시 오픈이라는 뜻이다.

성약한 후에는 계약이행이 완료될 때까지 관리(Care)해야 한다. 항차가 끝나고 수수료를 챙겼다고 종료된 것도 아니다. 클레임 건이 생기면 해결될 때까지 보살펴야(A/S) 한다. 서비스 정신이 결여돼 있으면 해운중개사는 존속이 어려워진다.

 

늦은 시간 가까운 한식집으로부터 저녁이 배달되었다.

 

“항해 중 야식 먹는 기분이군. 라면에 감자, 양파, 마늘, 계란을 넣어 끓이면 그야말로 진국이야. 승선 향수가 사람 잡구먼.”

 

야간당직 야식 추억이 송대길에게 냄새로 피어올랐던 것이다.

손주리가 추억에 불붙이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럼 라면 끓여드릴까요? 부장님.”

 

“저녁 된장 맛도 좋아. 된장국에는 역시 멸치가 들어가야 돼.”

 

“부장님, 진짜 요리 잘하시는가 봐요. 언제 한번 솜씨 보여주세요.”

 

“나의 요리는 그냥 입술로 다해버리니까.”

 

시장할수록 맛이 좋은 법이다. 혼자보다는 둘이 먹는 게 맛을 돋운다.

 

“정기선 영업은 야근이 많지 않았을 거야. 부정기선 영업하다보면 앞으로 야근이 많을 거라고. 선박과 화물 종류도 많으니까 공부도 계속해야 하고……. 주리 씨 후회 안 해요?”

 

“새로운 일이라서 배울 만해요. 어떤 종류가 있는데요?”

 

이 숙녀의 배움의 집착은 보통이 아니다.

아는 대로 대답해주자.

 

“부정기선 화물은 보통 전용선으로 운송한다고 생각하면 돼. 그 전용선은 산적화물운반선, 액체화물운반선, 냉장화물선 및 기타 운반선으로 구분할 수 있고…….”

 

“더 자세히는요?”

 

“이를 세분하면 산적화물운반선(Bulker)에는 광석전용선, 석유광석겸용선, 석탄전용선, 곡물운반선, 시멘트운반선 등이 포함되고, 액체운반선(Tanker)에는 유조선, 액화가스선, 화학제품운반선, 당밀운반선 등이 포함되며, 냉장화물선(Reefer)에는 냉장운반선, 냉동선, 청과물운반선 등이 포함될 테고. 기타 운반선에는 목재운반선, 중량물운반선, 가축운반선 등이라 할까…….”

 

남자도 아닌 여자의 신분으로 이런 영업을 하겠다고 귀담아 듣고 있는 것이 기특하기만 하다. 그런데 요즘 우먼커리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히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닐까.

 

“그럼 저희들의 영업은 대부분 전용선이 되겠군요.”

 

“그렇지. 용선중개 업무는 특화해서 전문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요. 화물의 특성, 선박크기, 항로 등을 고려해서 경험이나 노하우가 많은 분야를 취급하는 것이 고객서비스에도 좋으니까. 우리가 취급하는 배는 전용선 중에서도 산적화물선, 즉 벌크선이 되겠지. 사실 벌크선은 척수에서나 톤수로도 세계전체 선박의 40% 차지하고, 벌크해상물동량은 거의 20억 톤에 가깝다고. 왜 놀라지 않아?”

 

“전 아직 감이 잘 안 잡혀요. 오늘 저녁 저희들이 핸들링하고 있는 배는 5만 톤 선적이니까 핸디급 벌크선이면 되겠군요.”

 

“이야기가 나왔으니 간단하게 벌크선을 알아봅시다.”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기 업무에 애정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송 부장이 설명해준 내용.

 

- 핸디사이즈(10,000-35,000DWT),

- 핸디막스(35,000-65,000DWT),

- 파나막스(65,000-80,000DWT),

- 케이프사이즈(80,000-200,000DWT),

- 대형벌커(200,000DWT이상).

 

“다른 것은 이해가 되는데, 케이프사이즈는 무슨 뜻예요?”

 

그녀는 송 부장의 밑천이 드러날 때까지 캐물을 태세로 나갔다. 그의 지식이 발가벗길 지경이다.

 

“선박이 너무 커서 파나마,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고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호프(Cape Hope)나 남미의 케이프혼(Cape Horn)을 돌아가야 하는 배를 말하는 거예요.”

 

이후 세계에서 가장 큰 벌크선은 1986년 현대중공업에서 건조한 노르웨이 선박 베르게스탈(Berge Stahl)로 알려져 있다. 톤수는 무려 36만DWT, 길이 364m, 폭 65m, 깊이 23m나 된다. 본선 하역기구가 없고 또 크기와 수심 등을 고려해서 특수항로에만 투입되고 있다.

 

“20만톤 배의 화물 중개 커미션은 참으로 많을 것 같네요.”

 

“주리 씨는 역시 영업맨이야, 아니 영업우먼이야. 영업부 직원은 영업실적에 항상 관심이 많아야 하고 계산도 빨라야 해요. 브라질 철광 톤당 운임 20달러에 1.25퍼센트라면 5만달러, 괜찮은 장사 아녀?”

 

“압구정 아파트값이네요. 저희 부서 전도가 유망하구요.”

 

“희망이 달덩어리지.”

 

그러면서 그는 두 팔로 큰 달을 그려보았다.

 

“부장님은 벌크선에 직접 승선하셨으니까, 화물 싣는 데 주의할 점이라면요……?”

 

“좀은 궁금하겠지.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설명은 시작되었다.

 

곡물 같은 것은 유동성이 있어서 배의 운동에 따라 화물의 침하(沈下)와 이동을 일으키고, 무게중심의 횡이동(橫移動)과 배의 횡경사(橫傾斜)를 일으켜 배의 균형을 불안전하게 할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곡물 적재에는 특별한 규정이 있으며, 전용선은 이에 따라 횡단면 형상이나 복원성 등이 규정되어 있다.

 

일반 화물선으로 운송할 경우에는 적재 위치의 제한, 화물이동방지판(Shifting Board)의 설치, 침하에 의하여 갑판 밑에 빈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공급장치(Feeder)와 통(Bin)의 설치 등이 필요하다. 석탄화물의 이동은 화물경사와 수분함유의 문제가 있다. 또 자연발화 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이에 관한 규정은 SOLAS와 IMO의 BC Code 등에 들어있다.

 

“이러다가 우리 일은 언제하지?”

 

한참 설명하다가 강의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상대방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잖아요. 그때까진 할 일도 없구요.”

 

“…… 하긴 그렀네.”

 

“배울 게 너무 많군요. 배가 한국에 입항하면 한번 견학하고 싶어요.”

 

앞으로 어떤 남자가 나타나 이 호기심 많고 야심 많은 여자를 만족시켜줄 건가.

청출어람의 재원이 탄생할 날이 머지않았나.

 

“지금 몇 시지? 밖이 많이 어둔데.”

 

“12시 가까워졌어요. 곧 인도에서 연락이 오겠지요?”

 

현재 말라카해협을 통과해 인도양을 항해하고 있는 배를 위해 조속히 성사시켜야 한다. 물론 화주에게는 본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리지는 않았다. 이쪽에서 급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소금의 용도는 다양하다. 소금 속에 들어있는 나트륨은 화약제조에 사용된다. 한편 부정 타지 않도록 집 앞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소금이 기운을 돋우고 주위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라나. 오줌싸개 애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하는 것도 허약한 아이의 기운을 돋우기 위함이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라고 흔히 말하는 것을 듣는다. 소금은 맛을 내고 부식을 방지하며 주위를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화주로부터 메시지가 늦어지자 그녀의 호기심이 또 발동하기 시작했다.

 

 

 

* * * * *

 

“야간항해 중에는 선교가 어두워야 한다고 들었는데 무섭지 않아요?”

 

“별 것 다 알고 있네, 주리 씬…….”

 

해운회사에 근무하려면 선박에 대한 상식이 많으면 좋긴 하다. 그래, 심심하니까 대화나 하자.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시간 때우기를 하는 것같이 보인다.

 

“항해사와 조타수가 함께 당직근무 하니까 괜찮으나 조타수가 선내 순찰이라도 나가면 좀 무섭기도 하지. 고독과 공포가 동시에 엄습하면서 피부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라고 할까.”

 

추리소설 읽는 표현은 그녀에게 무서움만 자극했다.

 

“폭풍우라도 치면 더욱 무서울 것 같아요. 저는 무서움을 너무 많이 타요.”

 

처음 듣는 이야기다. 눈 큰 사람이 무서움이 많다는 건 결코 거짓말이 아닌가 보다.

때론 조용한 상태가 더 무서울 때가 있는데.

 

“실은 조용한 바다가 더 무서워. 호수 같은 바다는 뭔가 물에서 솟아오를 것 같은 착각이 있기도. 어떤 괴물이 있다고 하자. 큰 파도에서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조용한 바다에서 갑자기 솟으면 그 괴물은 얼마나 커 보이겠어. ‘커~억’ 하면서 솟아오른다면 말야.”

 

표현이 지나쳤는지 손주리는 그의 팔을 꼭 잡았다.

 

“부장님, 무섭게 모션하지 마세요. 지금 새벽시간예요.”

 

“그럼 내 조용한 이야기 하나 해주마. 괜찮겠지?”

 

“네, 그런 건 괜찮아요.”

 

“어느 배에서 야간당직 교대시 일항사가 삼항사를 놀려주기 위해 선교 중앙 앞쪽의 자이로컴퍼스 옆에 스냅자루를 세워놓았지. 그리고 그 위에 허수아비 모양의 흰 옷을 걸쳐 놓았고. 그리고는…….”

 

컴퍼스 밝기를 크게 조정해두었단다.

당직교대를 위하여 선교로 올라온 삼항사는 칠흑 같이 어두운 선교에서 유일하게 불빛이 보이는 자이로컴퍼스 쪽으로 갔다.

흰옷 입은 사람을 향하여,

- 안녕하세요.

크게 인사했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컴퍼스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크게 쳤다.

한 대 맞은 스냅자루는 단번에 쓰러졌다.

삼항사는 기겁을 했고, 사람 대신에 유령을 쳤다고 생각한 그는 졸도한 상태였다.

아이들이 따라할 장난은 결코 아님. 아니 어른도 안 된다.

 

조용한 이야기가 더 무서웠다. 마치 자신이 허수아비 유령을 친 것처럼 그녀는 떨고 있었다.

 

“정말 무서워요. 실은 전…… 화장실에 가려고 했었는데. 무서워서 못 가겠어요.”

 

좀 급하다는 신호다.

 

“같이 가 달라는 거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도 여러 가지군.

 

큰 건물의 한 쪽 귀퉁이에 있는 화장실은 밤에는 결코 마음 편한 자리가 아니다. 뒤쪽 고층건물의 12층에서는 일 년 전에 모 재벌 회장이 투신자살한 곳이다. 그쪽에 눈이 가는 것은 어둠이 누르고 있는 꼭두새벽에 사람의 마음을 졸아 붙이기에 딱 알맞다.

 

“부장님, 감사합니다. 좀 부끄러워요.”

 

일을 마친 그녀는 부끄러운 모습을 미소로 감추었다. 황도환 과장이 보았더라면 질투할 뻔했다.

 

새벽 2시 가까워서야 주요 조건(Main Terms)을 기재한 응답(Counter Offer)이 왔다.

타자실력이 좋은 손주리가 수정내용을 실시간 텔렉스로 보냈다. 정박기간(Laytime)에 대한 이쪽 제안을 수용(Accept)하면 나머지(Others)는 지난번 성약서(Fixture Note)에 준한다는 내용이었다.

금방 긍정적인(Affirmative) 답이 왔다.

 

이리하여 합의한 주요내용을 정리해(Recapitulate) 송부함으로써 오늘 계약은 성사되었다. 운송계약서는 오후에 작성해서 서명해 보내면 된다.

 

“정박기간은 7일 후부터 시작(Commence)되므로 선속을 다소 낮출 필요가 있군. 일단 일본 선사에 알리도록 합시다.”

 

“전문 작성해서 보여드릴게요.”

 

영문 메시지 작성을 매끄럽게 잘하는 재원(才媛)이 부서에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자랑거리다. 거기다가 눈치도 빨라 시간의 허비가 적어 금상첨화다. 필요시 자진해서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필요할 때의 친구가 진짜 친구다’의 격언을 갖다 붙여도 될까.

 

"한 건 했으니까 내일 부서 회식을 해야겠군. 주리 씨의 공로가 컸다고 사장님한테 보고도 하고.”

 

“부장님 애쓰셨습니다. 배를 보내놓고 화물을 찾는 작업(Working)이 얼마나 피말리는 일예요. 위험부담이 있었는데도 결과적으로 잘됐으니 기분이 좋네요.”

 

“인생도 위험부담이 따르는 선택의 문제를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주리 씨도 큰 선택의 고비가 남았군. 짝을 찾아야 하는 문제 말예.”

 

“그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유명한 브로커(Broker) 송 부장님한테 의뢰하면 되니까요.”

 

고약한 여성. 부서장을 평생 중매쟁이로 써먹으려나.

 

“집까지 바래다줄 테니 나가자고. 출근은 오후에 해도 되니까 충분히 쉬어요.”

 

“피곤을 느끼지 못하니 야근이 체질에 맞는가 봐요.”

 

“그래도 건강관리 신경 써야지. 미인은 잠을 많이 자야 한다는데 야근을 시켜서…… 미안. 이렇게 하단 어머니께서 딸을 회사에 남겨두실지 의문이군.”

 

“사모님께서 늦게 퇴근하시는 남편을 묵과하실지…… 실례 ㅋㅋ.”

 

갈수록 태산.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부정기선 영업이야말로 부정기선의 스케줄처럼 정해진 출퇴근시간이 없다. 앞으로 그녀 앞에는 정석 없는 숱한 어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소 피곤에 지친 여자는 졸음으로 고개의 힘을 잃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송 부장의 어깨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러고도 야근 체질이라고?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야.

 

차가 방향을 잃었다가 바로 돌아온 것은 천만 다행이다.

차체의 흔들림에 그녀가 깜짝 놀랐다.

 

“부장님, 죄송해요. 제가 졸았나 봐요.”

 

차보다 그녀의 가슴이 더 흔들렸던 것 같다.

 

“주리 씨가 쓰는 샴푸는 특이한가 봐.”

 

“……!?”

 

차는 그녀의 집 앞에 섰다.

 

“운전 조심하세요. 부장님.”

 

웃음을 남기고 손주리는 대문 안으로 사라졌다.

부정기선 업무는 여자한테 무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