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기회의 땅 러시아

기회의 땅 극동러시아(제 2회)

오선닥 2016. 1. 24. 20:33

2007년 여름
연해주 답사에 나선 ‘극동평화연대’
7명의 답사팀은
속초항을 출항해
러시아 자루비노항으로 가는데…


▲속초-자루비노 간 여객선




제 2회



연해주 답사


비행기도 아니고 기차도 아니었다.
사공박(司空博)이 몸을 실은 것은 커다란 여객선이었다.


속초를 출발하여 러시아 연해주로 가는 답사팀에 그가 합류했다. 사업가이지만 그가 답사팀에 참여한 것은 나름대로 담당할 몫이 있기 때문이다. 답사팀 7명은 모두 <극동평화연대>의 멤버들이다. 이들은 문화재단, 농협, 통일연구원, 시민단체, 작가, 학자 그리고 사업가로 각각 한 명씩이다. 사공박은 사업가로서 참여했다.


배가 러시아 자루노비항에 도착할 무렵 여행가방을 들고 갑판으로 나온 여류 수필가 정은숙이 사공박 사장 곁으로 다가왔다.


“사공 사장님이 연대의 일원되심은 저희의 영광이요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주목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공박은 어리둥절한 나머지 고개를 숙였다. 사십대 중반의 남녀가 보인 표정은 데이트에서 처음 만난 청년 연인들보다 더 어색한 모습이다.
 
“사업가가 주제넘게 끼어들어 혹시 폐가 된 것은 아닌지…… 부족한 저, 잘 부탁드립니다.”


사실 부족하기 짝이 없다. 전문가나 학자도 아닌 장사치가 이런 고상한 단체에 끼어들었다는 자체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늘 미안하다는 생각으로 가능한 대화를 줄여 왔던 사공박이다. 이번엔 정은숙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커피를 자주 사시니 저희들이 미안해서요.”


“제가 기여할 것은 그것밖에…….”


“무슨 겸손의 말씀을. 사업마인드가 탁월하셔서 저희가 사업 계획 세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회장님도 말씀하셨어요.”


극동평화연대의 회장은 문화재단 이사장 출신의 전원채이다. 나이가 70대 중반인데도 건강미가 넘친다. 이번 답사팀의 최고 연장자이기도 하다.


사공박의 회사는 ㈜극동연구회이다. 그런데 회사 이름이 참 이상하다. 주식회사가 연구회라니? 여기에서 사공박의 괴팍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런 성향으로 인해 그는 자주 오해받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그렇다 치고 마누라가 불만을 드러낼 때는 외로움마저 느낀다.


그가 3년 전 회사를 설립했을 때 마누라는 언어폭력에 가까운 말로 회사명을 혹평한 적이 있다.


“당신 혹시 패스 아니세요? 회사 이름이 연구회가 뭐예요?”


패스 앞에 ‘사이코’를 빼고 말한 것은 불필요한 싸움을 걸지 않겠다는 마누라의 지혜 넘치는 대화법이라 하더라도, 이건 좀 너무했다. 그러나 불만을 꾹 참고 부드럽게 응수했었지.


“좀 튀어보려 하는데 그렇게 불만이여?”


“연구소도 아니고…… 누가 장난친다고 그러겠어요.”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지은 이름이라니까. 극동러시아를 연구하며 사업하겠다는 봉황의 뜻을 당신이 알어?”


“봉황이 두 마리 들었다간 우주선 연구하겠네요.”


이 정도로 옥신각신은 끝났다. 여하튼 미지의 세계, 극동러시아를 연구하지 않고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무모하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도 낯선 땅이라 마구 덤비는 것은 실패를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다.


‘연구하면서 사업’이 그의 모토다.


속초항을 출항한 배는 16시간을 밤새워 항해한 끝에 연해주의 자루비노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러시아 국경을 통과하는 독특한 경험부터가 답사 여행의 시작이다.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발해의 옛 땅 연해주를 돌아보는 것이 이번 답사의 목적이다. 우선 ‘우정마을’을 방문하여 고려인들이 일구어놓은 농업 현장과 실험 농장을 살펴보며, 샤마라 해변과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보는 것이 주된 일정이다.


자루비노항에서 '우정마을'이 있는 우수리스크시까지는 울퉁불퉁한 도로를 따라 3시간 달려야 한다.
 
6월 중순 차창 밖으로 펼쳐진 유채꽃이 지평선을 이룬다. 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콩밭이 멀리 끝도 없이 전개된다. 깨끗한 땅, 비옥한 땅, 가능성의 땅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해주는 러시아 이름 같지 않아 왠지 낯설지 않은 곳으로 느껴진다. 러시아어로 프리모스키 주라고 하는데, 프리(연안)와 모스키(바다)를 합하면 연해주가 된다. 고려인을 빼놓고 연해주를 이야기할 수 없다. 가슴 아픈 모습으로 살아 숨쉬고 있는 이 땅에는 한민족의 연대가 있다.


한때는 아프고도 슬픈 역사가 밴 웅대한 땅, 고구려보다 두 배나 넓었다는 발해의 땅이었던 연해주가 아닌가. 연해주는 16만 제곱킬로미터 크기로 인구는 겨우 200만여명이다. 이중 블라디보스토크 60만, 나홋카 17만, 우수리스크 16만이 살고 있다. 연해주는 북쪽은 아무르강, 서쪽에는 우수리강, 동쪽은 동해, 남쪽은 북한과 경계를 이룬다.


답사팀의 일원인 역사학자 육해수의 설명은 계속된다.


고구려, 발해로 이어진 조상의 발자취는 나당 연합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대동강 이북 땅을 당 나라에 헌납하자 북방의 우리민족은 중국의 노예가 되어 중국 변방으로 흩어져 천년의 단절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만주 땅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분열과 갈등으로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지 못하고 광복 후 한반도마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만 상황이다.


“사장님, 전 기분이 참 이상해요. 마치 고향으로 가는 기분이랄까.”


12인승 합승을 타고 가는 중에 정은숙이 멘탈에 빠진 말을 했다. 일행 중 가장 젊은 40대 중반의 그녀와 사공박은 좌석을 나란히 했다. 일행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듯 하지만 아무도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주 150년의 역사 속에 디아스포라의 애환이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공박의 응수는 그 정도였다.
깊은 이야기는 역사학자의 설명을 빌리는 수밖에 없다.


▲자루비노항


1860년부터 우리민족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세도정치의 학정과 수탈에 못 견딘 농민들은 관권이 미치지 않는 두만강 너머로 이주했고, 1869년을 전후한 함경도 대흉년으로 기민(飢民)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이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910년을 전후해 항일 운동의 새로운 기지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이 대폭 늘어났다. 간도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번에는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간도와 연해주는 신채호, 이상설, 이종호, 이동녕, 이동휘, 안중근 등 역사적 항일 독립투사들의 처절한 활동 무대였기도 하다.


차를 타고 가는 중 누군가 육해수에게 질문했다.


“연해주는 원래 청나라 땅이 아니었나요?”


“그렇습니다. 연해주는 1860년까지 청나라 땅이었으나 아편전쟁으로 청이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싸우는 혼란기에 러시아가 중재자로 나서 연해주를 얻은 것이지요. ‘동방의 지배’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라는 도시가 그때 건설된 거죠.”


육해수의 역사 해설은 이어진다.


고려인은 한민족의 후손들이다. 조선인이 러시아로 이주하면서 고려인이 되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인을 조선족이라 하는 것과 대비되나 한민족의 후손임은 같다.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은 한민족 역사상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으며 살고 있는 동포들이다. 더 이상 이들을 방치할 수 없어 한국정부는 해외농업진출 활성화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 후 이주민이 점점 늘어나 일제강점기에는 23만명에 이르면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 1937년 그 비극적인 중앙아시아, 즉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10여개 불모지대로 고려인 17만명의 강제이주가 단행됐다.


“연해주에 피가 많이 뿌려졌다지요?”


정은숙의 질문에 육해수는 친절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당시 스탈린은 갑작스런 강제 이주에 대한 반발을 예상해서 한인 지도자와 지식인 3천여명을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했다. 그리고 일반 고려인들에게 불시에 명령서를 전달하고 곧바로 역으로 끌고 가 기차 짐칸에 태워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치다시피 버렸다.


강제 이주 과정에서부터 정착하는 2년여에 걸쳐 죽은 사람만도 2만명이 넘었다. 토굴에서 짐승처럼 시작된 삶이었으나 고려인들은 강인했다. 사회, 정치적으로 모든 것에 제한을 받으며 억압 속에 살면서도 중앙아시아를 쌀농사 지역으로 변화시킨 주역이 바로 고려인들이다.


"고려인들은 바위에 올려놔도 풀이 난다지요."


러시아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고 농협 대표 노무성이 들은 바를 말했다.


고려인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된 뒤 잘 사는 듯 했던 우즈베키스탄 등이 각기 독립하면서 집단농장 농지 재분배 과정에서 소수민족이 차별대우를 받아 다시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 러시아인으로 살았던 고려인은 언어의 문제 등으로 인해 아버지, 할아버지가 살았던 연해주로의 재이주가 불가피하게 시작되었다. 이동 수단, 정착 비용 등 숱한 난제가 봉착했다. 생업의 어려움과 자녀교육 기회 등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이 난제들을 풀어가며 고려인의 재이주를 돕는 것이 우리 '극동평화연대'의 임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5년 전에 '우정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거랍니다. 극동러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앞장서서 다른 민족, 다른 문화의 집합체인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평화연대의 회장이며 이번 답사단의 단장인 전원채 회장이 말했다. 생업에 바쁜데도 답사단에 참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소련 붕괴 이후 중앙아시아의 민족주의와 경제적 위기, 언어의 문제, 정치, 사회적 불평등 문제 등이 계속 존재하는 한 고려인의 연해주 재이주는 계속될 것이다.


“저는 답사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고려인, 조선족, 현지 러시아인, 북한 동포, 중국 한족 등과 다양하게 대화하면서 동북아 민족들의 평화사랑 마음을 담아볼까 합니다.”


정은숙이 수필가답게 각오를 다졌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야생 콩밭, 넓은 영토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구, 당장 쓰러질 듯 낡았지만 한 때는 기품 있었던 건물들, 은근히 아름답게 보이는 러시아 여인들, 반쯤 술에 취한듯하나 낭만적인 러시아 남성들이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그녀는 덧붙였다.


답사 차원을 벗어나 천년의 역사를 거슬러 민족혼을 찾고 북한 동포를 포함하여 한국인의 꿈을 이루는 징검다리로 연해주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간도지역 위치

<계속>